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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베트로 간 진주: 몽골제국 시기 보시 물품 속의 진주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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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일2021-11-24 13:5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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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베트로 간 진주: 몽골제국 시기 보시 물품 속의 진주 기록


HK+ 사업단 HK연구교수 최소영

 

  중앙유라시아의 불교 역사에서 티베트 사꺄파의 승려 팍빠('Phags pa)와 몽골제국 제5대 대칸 쿠빌라이의 만남은 큰 의미를 갖는다. 쿠빌라이가 아직 제왕이던 시절, 여러 종교에 관심이 있었던 그에게 그 비(妃) 차부이가 사꺄파(派)의 팍빠를 추천하였다. 이에 쿠빌라이가 그에게 관정을 청하였으나 처음에 팍빠가 이를 거절한 일은 유명하다. 관정을 받고 나면 스승과 제자 관계가 되며 따라서 무엇보다 쿠빌라이가 팍빠보다 낮은 자리에 앉아야 하는데 그것을 지킬 수 없을 것이라는 이유에서였다. 이에 차부이가 여러 신하들과 함께 있을 때는 쿠빌라이가 높은 자리에 앉고 소수가 모여 설법을 들을 때는 팍빠가 높은 자리에 앉는 것으로 조정을 하여 마침내 쿠빌라이는 1253년 팍빠로부터 관정을 받고 티베트 불교 사꺄파에 입문하게 되었다. 

  사꺄파의 저작에는 쿠빌라이 스스로가 이때 자신이 바친 보시를 나열한 문서가 수록되어 있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스승(즉 팍빠)에게 의복으로 금과 진주로 장식한 가사(na bza' gser dang mu tig gis spras pa'i snam sbyar), 보석으로 장식한 망토(rin po ches brgyan pa'i phyam tshe), 법의(chos gos, 法衣), 보석[이 달린] 모자(zhwa), 장화(lhwam), 좌석을 바쳤다. 또한 물품으로는 황금 산개(gser gyi gdugs), 금으로 된 여러 색깔 방석(gser gyi khre'u), 금잔(gser gyi phor pa), 은과 보석이 있는(dngul gyi ja'o rin po che'i) 자루가 있는 검(yu ba can gyi gri) 등을 바쳤다. 그리고 또한 보석 종류로는 금 1정, 은 4정, 낙타를 탈 때 쓰는 금(rnga mo'i chibs pa gser ma), 나귀(dre'u), 금으로 된 얇은 안장과 쿠션(gser gyi sga stan srab) 세 가지를 바쳤다. 


(ʼJam mgon A myes zhabs Ngag dbang kun dga' bsod nams, Dzam gling byang phyogs kyi thub paʼi rgyal tshab chen po Dpal ldan Sa skya paʼi gdung rabs rin po che ji ltar byon paʼi tshul gyi rnam par thar pa ngo tshar rin po cheʼi bang mdzod dgos ʼdod kun ʼbyung. 1629, Delhi: Tashi Dorji; Dolanji, H.P. : distributor, Tibetan Bonpo Monastic Centre, 1975. p.193)

  보시품이란 시주의 경제적•사회적 지위에 맞게 하는 것이고 쿠빌라이는 당시 대칸의 동생이었으니 그 권세가 누구보다 컸을 것이니 이 정도 보시를 할만 했을 것이다. 특히 목록의 첫 번째에 있는 ‘금과 진주로 장식한 가사(gser dang mu tig gis spras pa'i snam sbyar)’는 매우 화려한 의상인데 이는 몽골 지배층이 대단히 선호하던 화려한 직물인 금실로 짠 비단, 즉 나시즈(nasij, 納失失)에 진주를 달아 ‘주의(朱衣),’ ‘진주의(眞珠衣)’라고도 불린 지순(ǰisün, 質孫, 只孫) 의상의 일종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몽골 지배층은 대칸 선출 등 중요한 일이 있을 때 모여서 쿠릴타이와 그에 이은 연회를 열었고 이때 대칸이 하사한 똑같은 색깔의 고급 의상을 입었으며 이를 지순이라고 하였다. 여기에 그 권위를 높이기 위해 진주로 화려함을 더했던 것이다. 몽골인들은 진주를 대단히 좋아했다. 진주는 크기에 따라 ‘大珠(tanas)’와 ‘小珠(subut)’로 나뉘었다. 진주, 특히 ‘대주’는 遼東의 해안에서 생산된 것이었으며 그러므로 ‘北珠’라고도 불렸다. 이 진주는 몽골리아와 중국·西域 諸國으로까지 수출될 정도로 인기가 높았다고 한다. 


  그렇다면 쿠빌라이보다 먼저 관정을 받은 차부이는 어떠했을까. 사꺄파 측 기록은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그 때 왕비가 묻기를 “관정에 대한 보시(dbang yon)로 무엇을 바쳐야 합니까?”라고 하니 팍빠가 말씀하기를 “자신이 향유하는 개인 재물은 모두 바칠 수 있습니다. 특히 무엇이든 자신이 소중히 여기며 가치가 있는 물품을 바칩니다.”하시니 왕비가 말하기를 “내가 혼인할 때 부모가 준 이것이 가장 가치가 큰 것입니다.”라고 하고서, 위에 진주알(mu tig) 하나가 있는 귀걸이(rna rgyan)를 팍빠에게 바쳤다. 이것을 한 몽골인(sog po)에게 팔아서 금 1 정(gser bre chen), 은 1천정(dngul bre chen stong)을 받았다. 팍빠가 올라 왔을 때(티베트에 왔을 때) 이것을 짱 지방 추믹(gtsang chu mig) 법회와 사꺄 사원의 대 금정(ser thog chen mo, 金頂)을 만드는 자금으로 썼다고 한다.

(ʼJam mgon A myes zhabs Ngag dbang kun dga' bsod nams, 위의 책, p.178) 
  차부이는 ‘자신에게 가치 있고 소중한 것’으로 진주가 각각 한 알씩 붙어 있는 귀걸이를 보시하였고 그것은 금 1정, 은 1천정의 가치가 있는 고가의 물품이었던 것으로 밝혀졌다. 이 진주알은 이른바 대주(大珠) 즉 ‘tanas’ 라고 불리던 큰 알 진주인 것으로 보이며, 1250년대 당시 몽골제국에서 대주 한 알의 가치를 여기서 볼 수 있다. 
  그뿐만이 아니다. 기록에 의하면 이들보다 앞서, 처음 중앙티베트를 침략했던 몽골 제왕 쿠텐이 티베트 대표로 팍빠의 삼촌인 사꺄 빤디따를 소환할 때에 보낸 소환장에는 다음과 같이 쓰여 있다.

  나의 부모와 천지의 은혜에 부합하기 위하여, 길의 취사(取捨)를 착오 없이 가르치고 아는 라마 한 명이 필요하여 조사해보니 그대가 있었다. 그대는 길의 험난함을 보지 말고 와야 한다. 만약 그대가 나이 들었다(는 이유를 댄다)면, 예전에 왕이신 성취자(즉 붓다)께서 유정(有情)의 이익을 위해 몸을 셀 수 없이 보시하신 것은 무엇이겠는가. 네가 아는 법(法)의 맹세를 어길 것인가? 붓다의 가르침과 많은 유정을 생각하여 너는 속히 오라. 해지는 쪽의 승려들을 네가 관할하게 할 것이다.  


  하사품으로 은(dngul, 銀) 5정, 진주 6천 2백 알을 바느질 해둔 양단(洋緞, gos chen)으로 된 가사(袈裟), 유황(lu hang) 숄, 장화, 버선(양말)과 함께 카띠(kha ti) 비단 정폭 두필, 퇸띠(thon ti) 비단 정폭 두 필, 오색 양단(sna lnga gos chen) 20필 등이 있다.

  이 통지를 단사관(斷事官)과 왼조 다르마(dbon jo dar ma) 두 사람에게 보낸다. 

  용해(1242) 여덟 번째 달 그믐에 썼다. 

(ʼJam mgon A myes zhabs Ngag dbang kun dga' bsod nams, 위의 책, p.134)

  무엇보다 눈에 띄는 것이 바로 ‘진주 6천 2백 알이 바느질 된, 양단으로 된 가사(gos chen gyi chos gos mu tig gi tshom bu can la mu tig stong phrag drug dang nyis brgya)’이다. 즉 이 역시 비단으로 만든 의상에 진주를 장식한 것인데 기록이 사실이라면 진주알의 수가 대단하다. 쿠텐은 이 물품들을 보내면서 “나의 부모와 천지의 은혜에 부합하기 위하여, 길의 취사(取捨)를 착오 없이 가르칠 스승이 필요하다.”고 말하고 있다. 그 말투는 고압적이나 이 소환장은 사꺄 빤디따가 정치적 대표로서만이 아니라 종교적 조언자로서 소환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쿠빌라이가 팍빠에게 준 비단 가사에 진주가 몇 개 달려 있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쿠텐이 보낸 것 역시 그와 유사한 의상이다. 그런데 진주의 수가 구체적으로 기재되어 있어 그 화려함을 실감할 수 있다. 티베트 불교 교파들, 특히 까귀파의 승려들은 몽골제국 흥기 직전에 서하 왕실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고 그때도 역시 많은 보시를 받았을 것이다. 그러나 일개 몽골 제왕인 쿠텐이 보낸 이 ‘진주 6천 2백 알이 달린 비단 가사’는 신흥 몽골국의 부와 세력을 보여준 상징적인 물품이라고 할 수 있겠다. 


  『고려사』는 충렬왕이 자신에게 시집온 쿠빌라이의 딸 쿠틀룩 켈미시 공주를 위해, 당시 몽골 조정으로 가던 회회 출신 장순룡 등에게 ‘진주의(眞珠衣)’를 구매해 오게 특별히 부탁을 한 일을 기록하고 있다. 마침내 2년 뒤 고려로 들어오는 사신이 이 옷 두 벌을 공주에게 바쳤다고 한다. 이 기사 역시 몽골 지배층이 티베트 승려에게 보냈던 진주 가사의 높은 가치와 희소성을 보여준다.

  즉, 몽골제국 초기 지배층은 티베트 승려들에게 값비싼 진주를 기꺼이 바쳤으며 승려들은 이것을 재원으로 하여 경전을 펴내고 법회를 열고 사원을 수리했다. 몽골이 티베트로 보낸 크고 작은 진주들이 13세기 티베트 불교 부흥에 중요한 재원으로 쓰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