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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덕꾸러기가 된 귀한 과일 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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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일2021-01-10 17:44: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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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덕꾸러기가 된 귀한 과일 귤


HK+사업단 부단장 노대환

 

 

  겨울이 제철인 귤은 맛도 좋고 값도 비싸지 않아 많은 사람들이 즐겨 찾는 과일이다. 하지만 조선시대에는 왕 혹은 왕과 친한 신료가 아니면 맛 볼 수 없는 귀한 물건이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맛보는 것은 고사하고 평생 귤이 어떻게 생겼는지 구경조차하기 힘들었다. 조선 후기의 문신 조정철(趙貞喆, 1751~1831)은 연경에 갔다가 황제가 내려준 귤을 먹었는데 이름을 알지 못하다가 제주에 귀양을 와서 비로소 그것이 귤의 한 종류인 대귤(大橘)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조정철은 후일 형조판서에 오른 인물인데 그런 조정철도 대귤의 존재를 알지 못했던 것인데 몹시 귀하여 제주도에서도 친한 사람이 보내주어 몇 개를 먹어볼 수 있을 뿐이었다. 워낙 귀하다 보니 황감제(黃柑製)라고 하여 귤이 진상된 기념으로 실시하는 과거까지 있을 정도였다. 성균관과 사학 유생들에게 특별히 귤을 하사하고 시험을 본 후 성적을 매겨 시상했는데 황감제가 열리는 날 귤을 서로 먼저 차지하기 위해 유생들의 치열한 몸싸움이 벌어지고는 했다.

 

  귤은 왕실의 용품으로 귤이 올라오면 종묘에서 천신례(薦新禮)를 행한 뒤 왕실에서 사용하였다. 조선 전기의 진상 수량은 알 수 없지만 17세기 중반에는 거의 8만 개가 진상되다가 18세기에 들어서는 4만 개 정도로 줄었다. 당시 진상 수량을 맞추는 것은 쉽지 않았는데 귤이 제주도에서만 생산되기 때문이었다. 정부에서는 생산량을 늘리기 위해 귤나무를 다른 곳에 심어보려는 시도하기도 했다. 태종대인 1412년에는 제주에서 감귤 수백 그루를 가져와 순천 등 바닷가에 위치한 고을에 옮겨 심었고, 이듬해에도 다시 보내 감귤 수백 그루를 전라도의 바닷가 여러 고을에 옮겨 심었다. 하지만 결과는 실패였다. 풍토가 맞지 않아 연해에 옮겨 심은 귤나무에서는 열매가 재대로 열리지 않았다.

  방법은 어떻게 해서든 제주도에서 많이 생산하는 것밖에 없었다. 제주 관아에서는 생산량을 확보하기 위해 귤 밭을 조성했다. 중종대 제주목사로 부임한 이수동(李壽童) 같은 이는 진상을 위해 별방·수산·동해·명월·서귀 등 다섯 곳의 과원을 군사시설인 방호소(防護所)에 만들어 군사들로 하여금 관리하게 하였다. 18세기 초반 제주에는 약 40여 곳의 과원이 있었다. 관리들에게 귤 재배와 진상은 고된 업무였다. 과원을 조성해도 날씨가 받쳐주지 않으면 허사였다. 제주의 날씨가 변덕스러운데 감귤 꽃이 한창 피었을 때 바람이라도 불어 꽃이 떨어지면 그 해 귤 농사를 망친다. 귤이 잘 자라도 서울로 운송하기 위해 순풍을 기다리느라 시일을 허비하는 일이 적지 않아 귤이 썩기도 하였다. 귤 진상의 총 책임자 제주목사는 귤을 제 때 올리지 못하거나 중간에 부패되면 추고를 받거나 파직되기도 하였다. 영조 때 목사 윤식(尹植)은 종묘에 올려야 할 귤이 썩는 바람에 파직되었고, 정조 때 목사 윤득규(尹得逵)도 귤을 공급하지 못해 파직되었다. 귤이 제주목사의 숨통을 쥐고 있는 형세였다.

  가장 고통스러운 사람들은 제주도 백성들이었다. 귤이 일반인들이 감히 맛보기 힘든 귀한 과일이니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귤나무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귤을 팔아 돈을 벌 수 있어야 한다. 정약용에 따르면 전라도 지역에 귤나무 한 그루를 가진 선비가 있었는데 귤을 수확해서 환곡을 바쳤다고 한다. 분명 귤은 돈벌이가 될 수 있는 작물이었는데 현실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관의 침탈 때문이었는데 세종 때 제주도 찰방 김위민(金爲民)은 그 폐단을 다음과 같이 호소하였다.


  민간에서 과일 나무를 가꾸는 것은 앞으로 그 이익을 얻어서 자손을 위한 계획으로 하는 것이며, 또 민가에서 과일을 거두지 못하게 금하는 것은 이미 분명한 법령이 있는데, 지방관이 민가의 감귤로써 진상한다고 칭탁하고 나무를 세어 장부에 기록하고, 열매가 겨우 맺을 만하면 열매 수를 세어 감독해서 봉하여 두고, 혹시 그 집 주인이 따는 일이 있으면 절도죄로 몰아대고 전부 관에서 가져가므로, 백성은 이익을 보지 못하여 서로가 원망하고 한탄합니다


 -   『세종실록』  세종 9610-

  관의 횡포로 주인이 자기 나무에서 귤을 따먹으면 절도죄가 되는 웃지 못 할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실제 1426(세종 8) 제주에 사는 전 천호(千戶) 최봉(崔鳳)이라는 이는 명절날 자기 집 귤을 따서 조상에게 올렸다가 감수자도율(監守自盜律)로 곤장을 받고 죄명을 문신으로 새기는 자자(刺字)형을 당했다. 감수자도율은 물건의 관리를 맡은 관원이 도둑질을 했다는 죄목이다. 김위민은 수령들로 하여금 해마다 귤나무를 심게 하고 부득이하게 민간의 감귤을 거두어 진상할 경우는 그 값을 넉넉하게 쳐주도록 요청하였다. 김위민의 말대로 감귤 값을 잘 주면 시키지 않아도 백성들이 알아서 귤나무를 심었을 것이다. 하지만 마구잡이 징수 관행은 고쳐지지 않았다. 귤 진상의 폐단을 알고 있던 성종도 귤나무를 심는 자는 역을 면제해주고 후하게 상을 주면 기꺼이 나무를 심을 것이라며 의논해보도록 지시했지만 후속 조치는 마련되지 않았다.

 

  관에서는 민간의 귤나무에 열매가 열리기 시작하면 하나하나 열매 숫자를 세어 기록해 놓은 후에 수확 때 조금이라도 차이가 생기면 부족분을 물어내게 했다. 또 관에 귤을 운반하는 책임까지 지워 제 때 가져오지 않으면 벌을 가하기까지 했다. 귤 값을 보상하게 되면 보상금은 담당 관리의 주머니로 들어갔다. 백성들을 짜내면 되니 관에서는 굳이 과원을 늘이려 하지 않았고 더 많은 양을 요구하였다. 광해군대 선혜청의 보고에 따르면 제주 민에게 정해진 진상 수량의 4~5배를 징수하였다고 한다. 많은 귤이 사적으로 누군가에게 흘러 들어가고 있던 것이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백성들은 귤나무를 심으려하기는커녕 징수 독촉을 피하기 위해 심어놓은 나무도 밑 둥에 불을 지르거나 아예 뽑아버리기에 이르렀다. 문장가로 유명한 임제(林悌)1577(선조 10)년 말부터 이듬해까지 제주를 돌아보고 쓴 남명소승南溟小乘에서 민가에서 귤 보기를 독약처럼 여겨 즐겨 재배하려 하지 않는다.”고 밝히고 있다.


  조선 초기부터 귤 진상이 문제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대책이 마련되지 않았다. 1748(영조 24) 영조는 동부승지 한억증(韓億增)과 제주 토산품에 대해 이야기하다가 감귤을 진공하는데 폐단이 많아 민간에서 귤나무가 있으면 반드시 끓는 물을 부어 죽인다고 하는데 사실이냐고 물었다. 한억증은 실제 그런 폐단이 있다며, 민가에서 귤나무가 있으면 관에서 집주인을 과주(果主)로 정하고 나서 열매를 따서 바치게 한다고 답변하였다. 문제가 있음을 확인했음에도 불구하고 영조는 대책 마련에는 무관심하였다.


  귤 진상은 정약용(丁若鏞)목민심서에서 지적하였다. 정약용에 따르면 전라도 해변 고을이나 거기에 딸린 섬에서도 제법 귤을 생산했다고 한다. 그런데 18세기 후반에 들어 계속 귤 생산이 줄어 그가 유배되어 있을 당시에는 양반집에나 혹 한 그루 있고, 섬 안에 혹 수령이 직접 관리하는 나무가 몇 그루가 있을 뿐이었다. 정약용이 그 이유가 궁금해 물어보니 역시 관의 침탈 때문이었다. 매년 8월경이 되면 관에서 나와 장부를 가지고 나와 과일의 개수를 세고 나무둥치에 표시를 해두고 갔다가 익으면 와서 따 가는데 혹 바람에 떨어진 것이 있으면 곧 추궁하여 보충하게 하고 그렇게 하지 못할 것 같으면 그 값을 징수했던 것이다. 게다가 관에서 나온 이들을 대접한다고 마을에서 닭을 삶고 돼지를 잡는데 이웃에서 귤나무 주인 때문이라고 탓하며 들어간 비용을 요구하여 이것도 물어주어야 했다. 그래서 귤나무 주인은 결국 귤나무를 장부에서 없애기 위해 아무도 모르게 나무에 구멍을 뚫고 후추를 집어넣어 나무가 저절로 말라죽게 만들 수밖에 없었다. 정약용은 제주에도 이러한 폐단이 있으니 이런 일이 고쳐지지 않으면 몇 십 년 안 가서 우리나라에 귤나무가 없어질 것이라고 탄식했다.

  조선시대의 귤은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조선초기부터 말썽이 된 문제가 19세기까지도 해결되지 않고 계속 되었던 것은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다. 변방의 섬이라 대수롭지 않게 여겼던 것인지 아니면 또 다른 원인이 있는 것인지 검토해보아야 한다. 조선시대 상업과 관련해서도 고민할 여지가 있다. 조선후기에 들어 상업이 크게 발달된 것으로 설명되는데 어떻게 가장 귀한 과일인 귤은 상품작물이 되지 못했던 것일까. 귤이 활발하게 재배되지 못한 근본적인 이유는 관의 침탈 때문이라고 해도 상업 발달이 두드러졌다면 상인들이 귤을 그대로 보고만 있었을까 하는 의문이 남는다. 조그만 귤에도 많은 역사적인 이야기 거리가 있다는 것이 새삼 흥미롭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