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경,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어 문화가 되다 Ⅰ
작성자관리자
작성일2024-01-25 14:20:14
조회수506
안경,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어 문화가 되다 Ⅰ
고려대 역사교육과 변성현
인간의 감각에서 시각이 차지하는 비중이 80%에 달할 만큼, ‘본다’라는 행위는 인간의 삶에서 기본이자 핵심이다. 때문에 시력 개선을 위한 노력의 과정에서 안경은 인간의 한계를 극복하게 해준 혁신적인 발명품이다. 안경에 관한 최초의 기록은 1306년 수도사 조르다노 다 리볼타가 "(안경이) 세상에서 가장 쓸모 있는 기술 중 하나이며 이것이 발명된 지 약 20년도 되지 않았다."라고 한 발언으로, 이를 볼 때 1280년대에 안경이 등장한 것으로 추정된다. 15세기 유럽의 활판 인쇄술 발달과 함께 안경의 수요가 증대되었고, 안경은 대량으로 제작되어 유통됐다. 또 베네치아, 스페인, 아랍 등지에서 내구성과 투명도 면에서 우수한 유리를 생산해내며 안경 제작이 활성화됐다. 따라서 안경은 특정 지역의 발명품이라기보다는, 세계적인 교역망 속에서 정보와 기술이 오가며 발달한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안경은 어떻게 동아시아로 전래 및 확산되었고, 사람들 사이에서 어떤 의미와 상징성을 가졌을까?
Tommaso da Modena 작, Hugh of Saint-Cher 초상화(1352)
접때 경사에 있을 때 일찍이 지휘 호롱의 거처에서 그 아버지 종백공이 갖고 있던 선묘가 사여한 물건을 보았다. (중략) 근자에 참정 손경장의 거처에서 한 벌을 다시 보았다. 사용해보니 다시 그러했다. 경장은 좋은 말을 주고 서역의 상인에게 얻었는데 그 이름을 애체라고 들었다고 한다. 두 물건은 모두 세상에서 보기 드문 것이다.
장녕, 『방주집(方洲集)』
또한 사마르칸트, 합밀, 천방국, 말라카 등지에서 명에 소수의 안경을 조공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다시 말해, 안경은 조공이라는 공적인 루트로 획득하여 최고 계층만 향유할 수 있거나, 고가의 비용을 지불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제한적인 상품이었다.
만력(萬曆) 연간(1573~1620) 마카오의 포르투갈인과 선교사들에 의해 안경과 관련 지식이 전파되면서 안경은 광동(廣東)에서 강남(江南)을 거쳐 북경(北京)으로 점차 확산됐다. 먼저 마카오와 가까운 광주(廣州)에서 안경문화가 먼저 발달하였고, 안경을 생업으로 하는 사람들과 전문 점포들이 등장하면서 안경가(眼鏡街)가 형성됐다. 복건(福建) 역시 여러 기록에 주요 물산으로 '안경'이 등장하고, 지역 문인들이 안경을 구매하여 사용했다.
청대(淸代)에는 강남에서 안경 제작이 시작됐고, "경사(京師)에서 팔린 것은 모두 소주(蘇州) 일대에서 만든 것"이라는 말이 돌 정도로 큰 확산세를 보였다. 18세기 강남 대부분 도시에 안경점이 생겨났고, 항주(杭州) 주변에는 방물장수들이 방문 판매하기도 했다. 청대 그려진 『소주시경상업도책(蘇州市景商業圖冊)』에는 ‘익미재(益美齋)’라는 상호의 수정안경포, 안경 쓴 노인이 관찰되고, 방훈(放勛)의 회화집 『태평환락도(太平歡樂圖)』에서는 강남에서 바구니에 판매할 안경을 넣어 짊어진 상인이 묘사되어 있다.
『소주시경상업도책』과 『태평환락도』
중국에서는 자체적으로 수정(水晶)안경이 제작됐다. 유리 안경은 청초부터 유통량이 증가하며 저가에 보급됐지만, 이와 달리 중국에서는 수정으로 제작된 안경을 고급으로 여기고 더 선호하는 경향을 보였다. 조익(趙翼)은 중국의 수정안경이 기능 면에서 더 우월하다고 여겼다.
이 물건(안경)은 전조 명대에 매우 귀중했다. 혹은 내부에서 사여하거나 혹은 고호로부터 구해 유력자가 아니면 능히 얻을 수 없었다. 지금은 천하에 두루 퍼져 있다. 대개 본래 외양으로부터 왔는데 모두 파려로 제작한 것이다. 뒤에 광동인이 그 방식을 모방해 수정으로 제작했는데 그 상품을 능가했다.
조익, 『해여총고(陔余叢考)』
안경 제작자들이 증가하고 안경 역시 다양화되면서, 높은 신분임을 과시할 수 있는 수단은 바로 재질과 디자인 등에서 차별성을 드러내는 것이었다. 또 꾸준한 수요와 함께 수정안경은 기술적으로도 진보하였는데, 청명한 날에는 흑정을, 흐린 날에는 수정과 은정을 쓴다거나, 렌즈 볼록의 높낮이에 따라 구분하여 근시경으로 활용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