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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사(書寫)도구로서의 붓[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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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일2022-11-23 15:1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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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사(書寫)도구로서의 붓[筆]


 HK+ 사업단 HK연구교수 이승민

 

  종이·붓·먹·벼루를 가리켜 문방사우(文房四友)라는 말을 사용한다. 그런데 중국에서는 ‘지필묵연(紙筆墨硯)’에서 순서를 바꾸어 ‘필묵지연(筆墨紙硯)’이라고 해서 붓을 가장 앞에 두어 표현하기도 했다고 한다. 전통사회에서 붓의 용도가 얼마나 중요했는지를 나타내는 것이라 생각된다. 이러한 붓이 지니는 의미에 대해서는 조선시대 문신 이정형(李廷馨)이 고려후기부터 조선 선조(宣祖) 때까지 정치와 명신들의 행적을 서술한 다음의 기록을 통해서도 짐작할 수 있다. 


  무진년에 중종이 직접 글을 써서 정원에 내리기를, “예로부터 임금이 그 허물을 듣기 좋아하는 이는 적고 듣기 싫어하는 이는 많았다. 신하로서 그 임금의 허물을 알고 과감히 간하여 옳은 길로 인도하는 자는 곧 곧은 신하요, 그 임금의 잘못을 알면서도 아첨하느라 잘한다고 하는 자는 곧 아첨하는 신하이다. 옛날에 당 태종이 밖으로는 바른말을 받아들이는 아량이 있었으나 안으로는 부끄러울 만한 일이 있었으니, 나는 감히 하지 못한다. 만약 과실이 있다면 외정(外政)의 신하들도 모두 다 말해야 하는데, 더구나 명을 출납하는 승정원에 있어서랴. 바야흐로 지금 나의 잘잘못에 대해 너희들이 각각 숨김없이 말하라. 비록 지나친 말이 있더라도 죄주지 않겠다.” 했다. 이어 황모필(黃毛筆) 40자루와 먹[墨] 20홀(笏)을 정원(政院)과 보문관(寶文館)에 내려주며 이르기를, “지금 하사한 붓과 먹은 무릇 나의 과실을 숨김없이 말하여 바로 잡으라는 것이다.” 했다.


- 이정형(李廷馨), 『동각잡기(東閣雜記)』 ; 이긍익(李肯翊),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권7, 「중종조고사본말(中宗朝故事本末)」 -

  문자가 발명된 이후 붓은 사실을 기록하고 표현하는 중요한 도구였다. 또한 당대의 역사와 문화의 소산들은 붓과 직·간접적으로 관련을 맺어왔다고 할 수 있다. 

  한국의 붓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은 기원전 1세기경 창원 다호리 유적에서 출토된 것이다. 중국의 붓이 한국에 유입된 시기로 기원전 108년 낙랑군이 설치되고 이때부터 붓으로 한자를 기록하기 시작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삼국시대의 붓은 현재 남아있는 것이 거의 없으며, 고려시대에는 지식인들의 필수적인 문방구의 일종으로 붓 제작이 이루어진 것으로 보이며, 조선시대에 들어 특히 붓 제작이 성행한 것으로 보인다.  



[사진1] 기원전 1세기 후반 유적으로 알려진 경남 창원 다호리 1호 고분에서 붓과 칼이 함께 출토되었다.

이로 인해 중국과의 교류를 통해 한자 문화가 한반도에도 전래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출처 : 문화재청)


  한국의 전통 붓은 황모(黃毛)와 양모(羊毛)와 같은 동물류의 털을 소재로 한 모필(毛筆)과 칡이나 볏짚 등을 이용한 초필(草筆)로 나뉘어진다. 그중에서 황모필(黃毛筆)은 족제비 꼬리털로 만든 붓으로, 족제비 꼬리털은 털이 길지 않지만 힘이 강하고 예리한 표현이 가능해서 주로 세필(細筆)을 만드는 데 이용된다. 황모필은 한국에서 전통적으로 가장 널리 사용되어 온 붓이며, 중국과 조선에서 ‘천하제일의 붓’으로 평가받기도 했다.  


 

[사진2][사진3] 족제비 & 족제비 꼬리털

(출처 : 정동찬 외, 『겨레과학기술 조사연구(Ⅸ) -붓과 벼루-』, 국립중앙과학관, 2001, 58쪽)



[사진4] 족제비붓(황모필)

(출처 : 정동찬 외, 『겨레과학기술 조사연구(Ⅸ) -붓과 벼루-』, 국립중앙과학관, 2001, 99쪽)

 

  조선후기의 문신 장유(張維)는 다음과 같이 황모필의 우수성에 대해 이야기했다. 


  쥐과(科)에 속하는 동물로서 색깔이 노란 것을 족제비라고 하는데, 평안도와 함경도 지방의 산 속에 많이 서식하고 있다. 그 꼬리털이 빼어나 붓의 재료로 쓰이는데 황모필이라고 불리는 그 붓보다 더 좋은 것은 이 세상에서 찾아볼 수가 없을 정도이다. 내 친구 이생(李生)이 글쓰기를 좋아해 일찍이 어떤 사람에게 부탁해서 그 붓을 얻었는데, 터럭이 빼어나게 가늘고 번질번질 윤기가 흘러 기가 막히게 좋은 붓이라고 생각했다.


- 장유(張維), 『계곡집(谿谷集)』, 「필설(筆說)」 -

  이외에도 고려시대에는 중국의 『산곡문집(山谷文集)』·『송사(宋史)』·『고반여사(考槃餘事)』 등에서 고려의 황모필을 낭미필(狼尾筆)·서낭모필(鼠狼毛筆)·성성모필(猩猩毛筆) 등이라 부르면서 품질이 매우 뛰어나다고 기록했다. 조선시대에 들어서도 유득공(柳得恭)은 족제비 털로 만든 붓[황서낭미필(黃鼠狼尾筆)]이 제일 좋다고 했고, 이익(李瀷) 역시 “고려시대의 낭미필은 천하에서 보배처럼 여겼다는 것인데, 중국에서까지 칭찬하게 된 것을 보면 그 기술 역시 서투르지 않았다.”고 했으며, 이수광(李睟光) 또한 중국에는 없고 우리나라에서만 나는 네 가지 특산품으로 경면지(鏡面紙)·화문석(花紋席)·양각삼(羊角蔘)과 함께 황모필을 들기도 했다.  


  붓은 누가 어떻게 만들었을까. 조선시대의 경우 붓 제작은 경공장(京工匠) 중의 하나로 왕실과 관서에서 필요로 하는 각종 물품의 제작에 종사하던 전업 수공업자인 필장(筆匠)이 담당했다. 경공장에 속한 필장은 8인, 외공장(外工匠)에 속한 필장은 황해도에 배정된 3명이었다. 황모필의 원료가 되는 족제비 털은 충청도·경상도·전라도·황해도·평안도·함길도 지역에서 생산되는 토의(土宜)로 공납을 받아 필장들이 붓을 만들어 국가의 수요에 충당했다. 한편으로 필장은 개인적인 부탁으로 붓을 만들기도 하고, 또는 붓을 파는 필방(筆房)과 필상전(筆床廛)에 붓을 만들어 공급하기도 했는데, 한양에는 여러 곳에 붓·벼루·종이를 파는 필방과 붓을 상 위에 늘어놓고 파는 필상전이 있었다고 한다. 관리들은 임금으로부터 지필묵을 하사받으면 무한한 영광으로 여겼고, 늘 아끼고 애용하던 붓이 닳아 못쓰게 되면 필장에게 부탁해 붓털만을 갈고 붓대는 그대로 사용하기도 했다고 한다. 그리고 족제비 털을 한편으로는 중국 연경(燕京)에서 구입해오기도 했는데, 이익은 중국인들이 황모필을 만드는 좋은 재료인 족제비 털을 조선에 팔면서도 정작 중국에서는 붓을 잘 만들어내지 못하고 조선의 황모필을 칭찬하는 이유를 알 수 없다고 했을 정도로, 황모필은 조선의 우수한 특산품 중 하나였다.


  붓을 만드는 방법은 위탄(韋誕)의 『필경(筆經)』, 유공권(柳公權)의 「사인혜필첩(謝人惠筆帖)」 등에서 찾아볼 수 있고, 조선시대 전통 붓의 제작기법을 가장 자세하게 살펴볼 수 있는 기록은 이익(李瀷)의 『성호사설(星湖僿說)』에 실려 있는 「만물문(萬物門)」이다. 


  붓을 만드는 방법은, 걸(桀)한 것은 앞에 세우고 취(毳)한 것은 뒤에 세우고, 강(强)한 것은 심을 넣고 정한[要] 것은 겉을 입힌다. 어저귀[檾]로 묶어서 붓대에 끼운 다음, 칠액(漆液)으로 단단하게 하고 해조(海藻)로 윤이 나게 만든다. 먹을 찍어 글씨를 쓰면, 바른 획은 먹줄처럼 곧고, 굽은 획은 갈고리처럼 구부려지며, 모난 획과 둥근 획은 규구(規矩)에 맞는다. 종일 쥐고 써도 깨어지지 않는 까닭에 필묘(筆妙)라고 한다는 것이다. 추측컨대 걸(桀)이란 곧 털이 긴 것이다. 털을 가지런하게 하는 방법은, 긴 것을 앞으로 하고 부드러운 것을 뒤로 해서 서로 섞어서 만드는데 조금씩 층이 있도록 하는 것인 듯하다. 내가 일찍이 딴 서적에 상고해 보니, “사람의 머리털 수십 개를 그 중에 섞어 넣으면 아주 좋다.”고 하였으니, 이도 역시 한 방법인 듯하다. 요(要)란 것은 털을 정하게 가린다는 뜻이다. 털을 묶는 방법은, 강한 것은 안으로 넣어 심을 만들고, 정한 것은 겉으로 두루 입힌다. 일정하게 만든 다음, 또 그 중에 더 강한 털을 가려서 심을 박고 부드러운 털로 겉을 둘러 마는 것이다.


- 이익(李瀷), 『성호사설(星湖僿說)』 권4, 「만물문(萬物門)」, 필묘(筆妙) -

  현재 전승되고 있는 황모필의 제작기법은 원모(原毛) 채집, 원모 선별 및 솜털 제거, 기름기 제거, 1차 혼합 및 앞정모, 길이별 재단, 2차 혼합, 뒷정모, 분모(分毛), 의체 씌우기, 물끝 보기, 초가리 묶기, 대나무 채집 및 건조, 필관 재단 및 치죽 상사치기, 대나무 속 파내기 및 결합, 우뭇가사리 풀 먹이기 등 총 15단계의 과정을 거쳐 1~2주 이상의 시간 동안 100여 번 이상의 손질을 거쳐야 하고, 붓을 만들 때는 1~2주 이상의 시간 동안 100여 번의 손질을 거쳐야 만들어지는 등, 오랜 시간과 노력이 들어야 완성되는 매우 정교한 작업이라고 할 수 있다.  


[사진5] 프랑스 국립기메동양박물관소장 기산(箕山) 김준근(金俊根)의 풍속화 모사복원품으로, 붓을 제작하는 필공이의 모습을 그린 그림이다.

한 명은 털고르기를, 다른 한 명은 마무리 작업을 하고 있고, 바닥에는 붓들이 놓여 있다.

(설명 및 출처 : 국립민속박물관)


  고려시대의 문방사우는 품질이 매우 우수해서 중국과의 주요 교역품이 되었으며, 우수한 품질의 문방사우는 조선시대에도 계속 생산되면서 국가 대 국가 사이의 관계에서 예단품과 교역품으로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황모필은 조선후기 청나라에도 별사방물(別使方物)로써 사은(謝恩)의 경우 황태자, 주청(奏請)의 경우 황제와 황태자에게 바쳐졌다. 일본과의 관계에서는 통신사(通信使)·문위행(問慰行)이 가져가는 예단품, 쓰시마(對馬) 외교사절에게 지급되는 회례, 그리고 각종 교역에서도 황모필이 널리 거래되었다. 


  지금 우리는 연필이나 볼펜, 혹은 애플펜슬과 같은 전자필기류, 그리고 컴퓨터 워드프로그램을 사용하면서, 주위에서 일반적인 필기도구로 붓을 사용하는 것을 쉽게 찾아볼 수 없다. 다만 전통 서예나 그림을 그리는 도구로서의 붓만 쉽게 떠올리면서, 과거에 비해 붓이 가지는 중요성과 역할은 축소되었다. 그러나 전통사회에서 붓은 사실을 기록하는 것 뿐 아니라 회화 등의 예술 분야에서도 널리 사용되면서 그 시대의 역사와 예술·문화 등을 표현하는 중요한 도구로서 인식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