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의 작물에서 자연의 저주로: 옥수수의 중국 유입과 환경파괴
작성자관리자
작성일2021-09-27 10:2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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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의 작물에서 자연의 저주로
- 옥수수의 중국 유입과 환경파괴-
HK+ 사업단 HK연구교수 김현선
알알이 터지며 쫀득함이 입안 가득 느껴지는 한여름 최고의 간식 옥수수, 여름의 끝자락 아쉽게도 옥수수의 계절도 함께 끝나가고 있다. 냄비 한가득 쪄서 냉동 보관해 놓았지만 바로 쪄서 먹을 때의 달콤함을 맛볼 수 없는 아쉬운 마음을 옥수수 이야기로 풀어내보려 한다.
옥수수의 중국 유입
3대 작물 중 하인 옥수수는 맨 처음 중앙아메리카에서 재배되었다. 그리고 마야 문명과 아즈텍 문명의 중심에 바로 옥수수가 있었다. 옥수수는 곡물 재배가 어려운 해발 1000~2000m의 고산지대나 해안가의 건조한 모래땅에서도 잘 자랐으며, 씨앗 하나로 100배 200배의 수확을 얻을 수 있었다. 중앙아메리카 사람들은 밀림의 척박함을 옥수수로 극복할 수 있었다. 옥수수는 단순히 생존을 위한 먹거리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옥수수가 있었기에 그들은 살 수 있었고, 옥수수가 사람을 키웠다. 따라서 옥수수는 신으로 추앙받았고, 옥수수 가루에서 인간이 만들어졌다는 탄생설화가 있을 정도였다. 옥수수는 그야말로 ‘신이 내린 작물’이었다.
‘신의 작물’ 옥수수는 식민지 개척자들의 해상교류를 통해 동아시아에 전해졌다. 중국에는 16세기 중엽 해로와 인디아-미얀마-윈난(雲南)을 통한 육로의 두 가지 경로로 전래되었으며, 윈난(雲南)에서 구이저우(貴州)와 쓰촨(四川)으로 점차 확대되며 보급되었다.
한편 중국의 농업은 전체적인 생산량이나 집약적인 생산 방식으로 볼 때, 매우 뛰어난 수준이었으며 집약적인 농지에서 높은 수확량을 올렸다. 하지만 늘 식량 공급과 인구의 균형이 맞지 않았으며, 중국 사회는 늘 구조적인 문제를 안고 있었다. 농업 기술을 개선하거나 새로 경작지를 개간해서 일시적으로 1인당 식량 생산량이 늘어나더라도 다시 인구가 증가하여 식량부족을 야기하였다. 특히나 1600년 이후 작물이 크게 증산되었다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었으며, 오히려 도작(稻作)의 생산이 한계에 이르러 식량 생산성은 점차 감소해 가고 있었다. 18세기 중국을 대표하는 인구학자 홍량길(洪亮吉) 역시 인구 증가가 경작지와 식량 부족을 초래했다고 지적하였다.
이러한 식량 문제를 해결해 주었던 것이 바로 아메리카에서 온 옥수수와 고구마 등 신대륙 작물이었다. 신대륙 작물은 중국에서 11세기 조생종(早生種) 벼의 광범위한 보급에 이어 두 번째 농업혁명의 동인이 되었다. 조생종의 보급이 용수 가능한 구릉의 개발에 도움을 주었다면, 신대륙 작물의 도입은 작물의 재배에 부적절한 건조한 구릉과 산지를 이용할 수 있게 해주었다. 일례로 1700년까지도 창장(長江) 유역과 북중국의 건조한 구릉과 산지는 대부분 미개간지로 남아 있었으나, 신대륙 작물 전래 이후 그러한 미개간지는 점차 옥수수와 고구마 경작지로 변하였다. 사실상 도작의 생산이 그 한계에 이르러 점차 생산성이 감소했던 시기 동안에 옥수수 등 신대륙 작물은 중국 식량 생산의 증가에 가장 많은 기여를 했으며, 지속적인 인구 증가를 가능하게 해주었다.
신의 선물에서 자연의 저주로
18세기 중엽에서 19세기 전반 인구 압력이 거세지면서 수 백만의 인구가 산시(陝西), 쓰촨(四川), 후베이(湖北), 후난(湖南), 윈난(雲南), 구이저우(貴主) 등 각지로 이동하였으며, 이주민 가운데 상당수가 삼림지대로 몰려들었다. 각 삼림지대로 이주한 사람들은 소규모 집단을 형성하여 식량을 생산하였고, 혹은 외부 자본가들은 대규모로 개발을 진행하였으며, 산지 수공업에 종사하는 등 다양한 경제활동을 펼쳤다. 이렇게 인간의 활동 범위를 산악지역으로 확장하는데 옥수수 등 신대륙 작물은 매우 중요했다. 옥수수는 특별한 기술이나 자본이 없어도 경작할 수 있었으며, 산지에 막 도착한 가난한 이주민들이 쉽게 재배할 수 있는 작물이었다. 따라서 이주민은 식량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옥수수와 고구마를 많이 재배했으며, 옥수수는 고구마와 더불어 산악지역 개발에 중요한 식량 작물로 보급되었다. 다음 후베이(湖北) 서부 산악지역의 자료는 이러한 변화를 매우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다.
건륭 연간에 이르러 비로소 옥수수를 심기 시작했는데, 당시 철광 개발자와 숯 굽는 자들이 왔다. (그들은) 무리를 지어 이곳에 당도했다. 도끼로 나무 자르는 것을 모두 잘하는 일이라 여겨, 첩첩의 푸른 산이 대번에 민둥산이 됐다. 동물은 도망가 숨어버리고 물고기는 사라져 산에 들어가 수렵하고 물가에서 고기 잡던 옛 시절은 다시 돌아올 수 없는 추억이 됐다. 외부의 여러 지역에서 온 사람들, 처자식을 거느리고 온 사람들 그리고 땅을 빌려 옥수수를 심는 사람들이 줄을 이어 이곳에 왔다.
『향씨족보(向氏族譜)』, 정철웅, 『자연의 저주』, 책세상, 2012, p.429에서 재인용.
한편 산지 주민들은 숲에 불을 질러 화전(火田)을 일구고 옥수수를 경작하였다. 화전은 나뭇재 덕분에 비료를 주지 않아도 토질이 비옥하였으며, 비료를 주지 않아도 상당한 수확을 기대할 수 있었다. 무엇보다 제초나 시비 등이 필요하지 않아 노동력을 절감할 수 있었고, 불이 꺼진 뒤 남아 있는 온기 덕에 파종한 씨앗이 쉽게 싹 트는 장점이 있었다.
화전으로 일군 경작지는 4-5년만 지나면 빗물이 흙에 씻겨 나가 이른바 석골(石骨)만 남고 경작이 불가능한 황폐한 땅으로 변하는 단점이 있었다. 이 때문에 산지 주민들은 지력이 고갈된 황폐한 땅을 버리고 다른 곳으로 이동하여 다시 화전을 경작하였다. 이러한 경작방식은 매우 원시적인 방법으로, 목재 생산, 상업작물 재배와 함께 산림을 매우 심각하게 파괴시켰다. 무차별적인 개발로 숲이 사라져 갔으며, 동식물 역시 감소하기 시작했다. 생태계 파괴로 사람들은 호흡기 질환, 말라리아 등 질병에 쉽게 노출되었으며, 기생충에 감염될 위험 역시 증가하였다. 뿐만 아니라 화전 농경으로 점차 숲이 줄어들자 비가 내리면 산사태가 자주 일어나고 산비탈에서 흘러내린 토사가 강바닥을 높여 계곡 주변에 홍수 등 환경 폐해가 속출하기 시작했다. 특히 창장(長江) 중하류 지역에서는 청말에 이르러 홍수가 거의 일상적으로 발생했으며, 홍수 이후 이질, 콜레라 등 수인성 전염병이 빈번하게 유행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