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茶]와 동부 유라시아의 역사: 차세[茶稅]・재정・국방의 삼중주
작성자관리자
작성일2021-09-12 09:2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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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茶]와 동부 유라시아의 역사
차세[茶稅]・재정・국방의 삼중주
HK+ 사업단 HK교수 임경준
동부 유라시아의 역사를 크게 변화시킨 물품 중 하나로 차(茶)를 들 수 있다 — 라고 말한다면, 대부분의 한국인들은 고개를 갸우뚱하지 않을까 싶다. 오늘날 한국인의 일상생활 속에서 차가 그렇게 친숙한 물품이 아니다. 집 근처에서 찻집 찾기는 어려워도 커피 파는 카페는 한 집 걸러 들어서 있다. 어디 깊은 산 속에 위치한 사찰이나 인사동 골목 한 구석의 전통찻집이 아니라면 한국인이 차를 접할 기회도 거의 없다. 당장 이 글을 쓰는 나부터도 아침에 일어나면 커피를 내리는 데서 하루를 시작한다. 기껏해야 커피에 질렸을 때 티백으로 된 차를 우려서 마시거나 밀크티처럼 차에 우유나 시럽을 첨가해서 마시는 정도가 한국인이 차를 경험하는 최대치가 아닐까.
그런데 유라시아 대륙의 여러 지역을 살펴 보면, 실로 다양한 종류의 차를 일상적으로 마시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유럽을 여행하다 홍차를 접하거나 일본에서 색다른 경험으로 가루차인 말차(抹茶)를 마셔 본 경험은 누구나 한번쯤 있지 않을까. 근래에는 코로나로 인하여 자취를 감췄지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중국인 관광객들의 한쪽 손에는 늘 찻물을 담은 병이 들려 있었다. 인도식 카레를 먹을 때 홍차에 우유를 첨가한 짜이(chai)를 곁들인다던가 몽골 음식점에서는 거의 틀림없이 전통차인 수테차(cуутэй цай)가 식전 음료로 딸려 나온다. 터키 사람들은 홍차에 설탕을 넣은 차이(Çay)라는 차를 즐겨 마신다.
즉 광대한 유라시아 대륙에서 서로 다른 문화권에 속한 사람들이 ‘차’라는 동일한 기호품을 즐기고 있는 것이다. 그간 인류를 매혹시킨 기호품은 많았지만, 차는 그중에서도 단연 돋보이는 사례이다. 유라시아 대륙 대다수의 주민들이 공통적으로 향유하는 기호품이라는 점에서 차는 한국인들이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인류의 역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물품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차’는 어떻게 하여 유라시아 대륙을 넘나들며 세계상품으로서의 지위를 획득해 나갔을까. 그 역사적 과정을 지역과 시대에 초점을 맞춰 살펴보도록 하자.
[사진 1] 차나무 (출전: Wikimedia Commons)
먼저 차의 종류와 생식 환경에 대하여 간단하게 정리해 두자. 차는 차나무에서 채취한다. 차나무의 학명은 Camellia sinensis인데, 이름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동백나무속에 속하는 조엽수이다. 병충해에 강한데다가 자체 번식력도 왕성하여 조엽수림대에 널리 분포하는데, 그 원산지는 중국과 인도로 추정되고 있다. 연평균기온 13~16도 이상이고 연강수량이 1,500mm 전후인 지역에서 차를 재배할 수 있다. 쾨펜의 기후구분에 따른다면 온대하우기후(Cw)가 재배에 적합하다. 절강성・복건성・안휘성과 같은 중국 남부와 대만・인도・스리랑카 등에서 차가 다량으로 생산되는 것도 이러한 기후적 조건 때문이다. 한반도에서는 전라남도 보성군과 경상남도 하동군 그리고 제주도를 비롯한 한반도 남부를 중심으로 차나무 재배가 활발하다.
봄에 돋아나는 차나무의 새순을 따다가 가공하면 우리가 일반적으로 마시는 차가 되는데, 찻잎을 가공하는 방법에 따라 다양한 종류의 차가 만들어진다. 발효를 하느냐 마느냐에 따라 차를 구별한다면 발효차와 비발효차로 나눌 수 있다. 우리가 흔히 마시는 녹차가 발효하지 않은 차의 대표격이라면, 발효의 정도에 따라 우롱차나 홍차가 만들어진다. 한국・중국・일본을 비롯한 동아시아에서는 시대에 따라 정도의 차는 있었지만 대체로 발효차와 비발효차가 널리 음용되었다. 이에 비해 몽골이나 티베트와 같은 북아시아・중앙아시아 일대의 주민들은 발효차에 소나 양의 젖을 넣어 마시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렇다면 차는 언제부터 마시기 시작했을까. 중국에서는 차의 기원을 서기전 2700년경에 신농씨가 처음 차를 발견했다는 설화에서 찾는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신화적 전승에 불과하여 신뢰할 만한 문헌자료를 통하여 구체적인 사실 여부를 확인하기는 어렵다. 다만 중국 차의 원산지로 여겨지는 사천 일대에서는 비교적 오래전부터 차를 재배해 왔던 듯하다. 4세기 동진(東晉)의 상거(常璩)가 쓴 『화양국지(華陽國志)』에 따르면 춘추시대에 파(巴/사천의 옛 지명) 지방에서 주(周) 왕실에 차를 바쳤다는 기사가 전해진다. 여기에 등장하는 차가 어떤 종류인지는 알 수 없으나, 차의 재배가 내륙지대인 사천에서 시작된 것은 분명해 보인다. 아마도 사천에서 재배된 차가 이후 장강(長江) 하류로 전해지면서 점차 중국대륙 전역으로 확산되었다고 보는 것이 합당하지 않을까 싶다.
차의 확산에는 위진남북조를 거치며 중국사회에 대두한 불교가 결정적인 기여를 하였다. 중국의 선승들 사이에서는 일찍부터 차를 마시며 수행하는 방식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그러던 것이 수당시대에 이르러 불교가 세를 불리며 귀족층과 서민층을 불문하고 신도가 늘어나면서 차 문화 역시 사회 깊숙이 퍼지게 된 것이다. 8세기 중반의 육우(陸羽) 역시 승려인 교연(皎然)과의 교유를 통하여 차에 눈을 뜨게 되었고 이를 계기로 『다경(茶經)』을 저술하였다. 『다경』은 차의 종류와 산지 분포만 아니라 차를 마실 때 쓰는 다양한 도구까지도 망라하고 있어 당대의 차 문화를 집대성한 저작이라 할만하다.
육우는 이후 다신(茶神)이라 일컬어질 정도로 중국 차문화사에서 거대한 족적을 남겼다. 그의 위상을 살펴볼 수 있는 일화로 당말(唐末)의 문헌인 『대당전재(大唐轉載)』에는 아래와 같은 기사가 실려 있다.
차를 파는 집에서는 항상 진흙을 구워 육우의 형상을 만들어서 부뚜막의 솥 위에 두고 다신(茶神)으로 여긴다. 물건이 팔리면 차로 육우의 형상에 제사를 지내고, 그렇지 않을 때에는 솥의 끓는 물을 붓는다.
즉 차를 파는 상인이 거래가 이루어져 이익을 얻었을 때에는 육우에게 차로 제사를 올리고 이익을 얻지 못하면 끓는 물을 부었다는 이야기이다. 이와 같은 장사의 수호신을 가리켜 중국에서는 행업신(行業神)이라 하는데, 전설의 술 장인으로 유명한 두강(杜康)이 주류업의 수호신으로서 숭배를 받은 것이 대표적인 예이다. 마찬가지로 당말의 도시에서는 차 가게마다 진흙으로 만든 형상을 장식하여 일종의 간판처럼 이용할 정도로 육우가 차의 행업신으로서 뚜렷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처럼 종래 소수의 선승들 사이에서 수행법의 일환으로 활용되던 차가 일약 대중적인 기호품으로 유행하게 되었다는 점에서 수당시대는 중국 차 문화사에 한 획을 긋는 분기점이라 할 만하다. 육우의 사례에서 미루어 짐작할 수 있듯이, 수도인 장안을 비롯한 도시 곳곳에는 차를 파는 가게가 생겨날 정도로 차 마시기는 사회적으로 일상적인 일이 되었다. 그런데 장안의 건조한 기후는 차를 재배하기에 적합하지 않다. 장안에서 소비되던 차는 남부지역에서 운송해올 수밖에 없다. 즉 대도시에서 차가 일상적인 기호품이 되었다는 것은, 바꿔 말하면 대중적 소비를 전국적 규모에서 뒷받침할 수 있는 유통망이 갖춰졌음을 의미한다. 8세기를 전후하여 차에 세금을 부과하고 국가 차원에서 전매하려는 움직임이 본격화되는 것도 이와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는 현상이다.
수당시대를 거치면서 차는 중국대륙을 넘어서서 유라시아 각처로 확산되어 나간다. 동쪽으로는 한반도와 일본열도에 차가 전래되었고, 서쪽으로는 위구르와 티베트에서도 차를 마시는 풍습이 점차 뿌리를 내렸던 것이 확인된다. 특히 티베트에서는 10세기를 전후하여 차가 일상생활에 빼놓을 수 없는 필수품으로 자리를 잡게 되었다. 그러나 국내에서 차가 생산되지 않았던 티베트에서는 차의 수입을 전적으로 중국 왕조와의 무역에 의존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당시 중국의 송 왕조는 국내에서는 당말 이래의 차세 부과와 전매제를 강화하여 국가재정을 뒷받침하는 한편, 대외적으로는 티베트로 차를 수출함으로써 전투마를 확보하여 거란・서하・여진과 같은 주변 세력의 위협에 대항하였다. 이렇게 중국왕조와 티베트 사이에서 이루어진 차와 말을 맞바꾸는 교역을 가리켜 차마교역이라 하는데, 이러한 무역 기조는 기본적으로 송 왕조 이후 명 왕조가 멸망하기까지 이어지게 된다.
한편 송을 군사적으로 압박하던 장성 너머 여진인의 금 왕조가 화북을 침입하면서 중국대륙은 금과 남송으로 양분된다. 지배자가 바뀌었다고 저변에 뿌리를 내리고 있던 사회 관습이 단번에 바뀌지는 않는다. 이미 유력한 기호품 중 하나로 자리 잡은 차는 여진인 지배층 사이에서도 점차 퍼져나가기 시작하였다. 문제는 금이 지배하는 화북 일대가 차를 재배하기에 적합한 기후가 아니었다는 데 있었다. 당말 이래 차는 전국 규모의 물류체계를 통하여 화북으로 유통되고 있었는데, 금과 남송에 의한 남북분단은 이러한 유통망이 단번에 끊어졌음을 의미한다. 차를 확보하기 위하여 금은 남송으로부터 거액을 들여 차를 수입하지 않을 수 없었고 이는 금의 국가재정을 압박하는 요인이 되었다. 차의 불균등한 생산 분포와 대중화가 정치권력의 향방에도 커다란 영향을 미친 것이다.
몽골제국에 의한 유라시아 대륙의 정치적 통합은 차가 동아시아를 넘어 유라시아 대륙 각지로 파급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오늘날 몽골에서는 양이나 염소의 젖에 차를 넣어 끓이는 수테차가 일상생활에서 빼놓을 수 없는 필수용품으로 여겨지지만, 칭기스 칸 시대만 하더라도 몽골에서 차를 마시는 관습은 존재하지 않았다. 아마도 칭기스 칸이 중국 지배를 위해 기용한 화북 출신자들에 의해 차 마시기가 몽골 지배층들 사이에 퍼진 듯하다. 이를테면 전진교(全眞道)의 교주 장춘진인(長春眞人) 구처기(丘處機)가 서아시아 원정 중의 칭기스 칸을 만나 차를 하사받았다는 기록이나, 거란인 출신 재상 야율초재(耶律楚材)가 사마르칸트에서 근무하는 중에 복건 지방의 차를 그리워하며 남겼다는 시를 통하여 칭기스 칸의 정복 전쟁을 계기로 중국의 차 문화가 파미르 고원을 넘어 유라시아 대륙 서방으로 파급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몽골제국~원 제국을 몰아내고 중국대륙을 수복한 명 왕조에게도 차는 중요한 국가 재원 중 하나였다. 몽골고원으로 돌아간 원 제국의 후예인 북원(北元)은 여전히 막강한 군사력을 바탕으로 명 왕조의 북방을 위협하고 있었다. 이에 대해 명 왕조는 차의 전매를 통하여 전투용 말을 구입하는 제도를 한층 더 강화하였고 민간 차원의 무역은 불법으로 간주하여 억압하였다. 그러나 전매를 강화하면 할수록 사무역과 밀무역이 만연하여 15세기에 이르면 차의 전매제도 자체가 붕괴되기 시작한다. 차로부터 얻는 세수는 국가재정 뿐만 아니라 북방 방어의 기초인 전투용 말의 확보와 직결되는 문제였다. 따라서 차를 둘러싼 세수제도의 파탄은 명 왕조가 붕괴하는 신호탄 중 하나였다고 평가할 수도 있다.
내부 반란에 의하여 자멸한 명을 대신하여 중국대륙의 새로운 주인이 된 청 제국 역시 차를 중요한 세수원으로 간주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명과 청이 처한 국제적 환경은 상이하였다. 명의 경우 몽골과 대립관계에 있던 관계로 북방 방어에 막대한 비용을 투여하지 않을 수 없었고 이는 국가재정을 압박하는 만성적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이와 달리 청은 그 자신이 변경지대에서 발흥한 신흥세력 중 하나였고 몽골과는 일부 세력을 제외하면 대체적으로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였던 까닭에 대외적인 국방문제에서 명보다는 비교적 숨이 트이는 상황에 있었다. 당대 이래 중국대륙을 지배하던 정치세력은 차에서 얻은 세수를 국방비로 전용해 왔다. 즉 차세・재정・국방 중 어느 하나에 문제가 발생하면 국가 운영의 파탄으로 귀결되던 구조에서 청 제국은 벗어나 있던 것이다. 청은 차가 필수품이면서도 자급자족할 수 없는 주변 세력을 회유하는 전략적 물자로 활용하였다. 특히 청 중기 이후 러시아나 서구 세력과의 무역이 활발해지면서 차는 세계상품으로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된다.
세계상품의 역사를 이야기할 때 근대 이후 서구세계가 확립한 전지구적 자본주의를 과도하게 강조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차’가 발상지인 중국대륙을 넘어 유라시아 대륙의 유력한 세계상품으로서 지위를 획득해 나가는 배경에는 중국왕조의 내부사정과 더불어 동부 유라시아의 주요 세력과의 관계 역시 중요한 요소로서 작용했음을 유념해 둘 필요가 있다. 아울러 차뿐만이 아니라 커피・담배・설탕과 같은 물품이 근대 이후 세계의 일체화를 견인했던 중요한 세계상품이라 한다면, 이들 물품의 역사적 궤적을 추적하는 작업은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의 원형적 형태를 살펴볼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