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도 전복이 고대 일본 문헌에서 발견된 까닭은?
HK+사업단 HK연구교수 이승호
제주도 전복의 역사
오늘날 한국인들의 많은 사랑을 받고 있는 전복은 제주도 특산품 중 하나로 잘 알려져 있다. 제주도 서귀포 일대에서는 약 200만 년 전의 것으로 추정되는 전복 화석이 출토된 바 있는데, 그만큼 전복이 오래전부터 제주도에 서식하였음을 알 수 있다. 아마도 제주도에 처음 사람이 살기 시작한 때부터 이곳 주민들은 전복을 채집하여 섭취하였을 것으로 생각되는데, 그것을 증명하는 사례로서 제주 애월읍 곽지리 패총에서는 전복과 전복 껍데기로 제작한 반달칼이 발견된 바 있다. 이미 선사 시대부터 제주도 사람들은 바다로 나가 전복을 채취해 식용하였으며, 그 껍데기로 여러 물품을 제작하기도 했던 것이다.
[사진 1] 제주 애월읍 곽지리 패총에서 출토된 전복 껍데기제 반달칼
사실 전복은 인류의 역사가 시작된 이후로 특히 동아시아 지역에서 오랫동안 사람들이 즐겨 찾았던 식재료이기도 하다. 지금으로부터 대략 2천 년 전 중국에서 전한(前漢)을 무너뜨리고 새롭게 신(新)을 건국한 왕망(王莽)은 제위 말년 스트레스로 인해 거식증에 걸렸지만 그래도 전복과 술은 먹었다고 전하며, 『삼국지(三國志)』의 영웅 중 한 명인 조조(曹操) 또한 말린 전복 요리를 무척이나 사랑했다고 한다. 또 중국 북송(北宋) 시대의 시인 소동파(蘇東坡)도, 신해혁명(辛亥革命)의 주역이었던 쑨원도 전복 요리를 즐겨 먹었다.
한국에서는 제주도 전복이 특히 오랜 역사를 자랑한다. 『세종실록(世宗實錄)』 지리지(地理志)의 전라도(全羅道) 제주목(濟州牧) 조에서는 제주의 주요 물산 중에 전복[全鮑]이 보이는데, 이처럼 제주도의 말린 전복은 조정에 진상되었던 특산품이었다. 왕실에서는 전복을 제례상과 수라상에 두루 활용하였으며, 명(明)에 조공품 중 하나로 바치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전복의 껍데기는 잘 세공하여 나전칠기의 장식으로 사용되었다. 여기에 더해 간혹 진주를 품은 전복이 발견되기도 하니, 전복은 그야말로 살부터 껍데기까지 버릴 것이 하나도 없는 귀한 자원이었던 것이다.
이처럼 전복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오랜 역사를 품고 있다. 특히 앞으로 이 글에서 다룰 전복에 대한 이야기는 고대 제주도와 일본을 잇는 폭 넓은 스케일을 자랑한다. 사실 한국 측 고대 문헌에는 제주도 전복에 대한 정보가 전혀 전하지 않는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고대 일본에서는 몇몇 고문서와 출토 목간을 통해 제주도 전복과 관련된 기록이 전해지고 있다. 도대체 어떤 연유에서 고대 일본인의 역사 속에 제주도 전복이 끼어들어가게 된 것일까.
고대 일본 목간에 보이는 제주도 전복, 탐라복
제주도가 역사상에 처음 모습을 보인 것은 기원후 3세기 무렵에 작성된 역사서 『삼국지(三國志)』를 통해서이다. 『삼국지』 동이전(東夷傳) 한(韓) 조 기사에서는 제주도를 ‘주호(州胡)’라는 이름으로 전하는데, 이때 주호는 당시 한반도 남쪽에 자리하였던 한(韓)과 서로 물건을 사고팔았다고 한다. 즉 이미 3세기 무렵 제주도의 주민들은 한반도 남부의 여러 소국들과 교류하며 생활하였던 것이다.
이후 제주도는 고대 삼국시대로부터 고려시대에 이르기까지 ‘탐라(耽羅)’라는 이름으로 불리었다. 처음 탐라는 『삼국사기』에 ‘탐라국’으로 등장하며 독립국가의 면모를 보였으나, 차츰 백제, 그 뒤에는 신라와 관계를 맺으며 서서히 이들 나라의 조공국 혹은 속국으로 위치하게 된다. 한편, 이 무렵 탐라는 백제와 신라뿐만 아니라 당나라 및 일본과도 교류하였음이 여러 기록을 통해 확인되고 있다. 당시의 제주도 주민들은 거친 바다를 극복해 나가며 동아시아의 여러 나라들과 다양한 교류를 이어나갔다.
그런데 이처럼 바다 건너의 여러 나라들과 교류하였던 고대 탐라인들은 외국과 관계를 맺는 과정에서 그들의 특산품인 전복을 적극 활용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 이미 고대로부터 제주도 전복은 ‘탐라복(耽羅鰒)’이라는 이름으로 일본에까지 수출될 정도로 유명하였음이 자료를 통해 확인되고 있다. 이러한 사실은 바로 일본 나라현 헤이조궁[平城宮] 유적에서 출토된 목간을 통해 알 수 있는데, 해당 목간과 거기에 기술된 내용을 제시하면 아래와 같다.
[사진 2] 헤이조궁[平城宮] 출토 탐라복 목간
위에 보이는 목간의 좌측 하단 부분에는 ‘탐라복 6근(耽羅鰒六斤)’이라는 구절이 보인다. 위의 판독문을 통해 알 수 있듯이 이 목간은 일본 천평(天平) 17년(745)에 작성된 것으로서, 745년 고대 일본의 지마국(志摩國, 현 일본 토가이도[東海道] 미에현[三重縣] 동남부 일대)이 제주도 전복, 즉 탐라복 6근을 당시 일본 천황가에 진상하였음을 알려 주고 있다. 또 고대 일본의 법령집 『연희식(延喜式)』 권24, 주계(主計) 상(上)의 조(調)와 관련된 기록에는 “비후국(肥後國, 현 규슈[九州] 구마모토현[熊本縣] 일대) 탐라복 39근, 풍후국(豊後國, 현 규슈[九州] 오이타현[大分縣] 일대) 탐라복 18근”이라는 구절도 보인다. 『연희식』은 10세기, 즉 일본 헤이안[平安] 시대 중기에 편찬된 격식(格式, 율령의 시행 세칙)으로, 그 가운데 주계식(主計式) 상(上)은 지금의 규슈·오이타·구마모토 등의 지역에서 내는 일종의 세금 명세서라 할 수 있다. 여기에 탐라복이 기재되어 있다는 것은 당시 탐라에서 잡아 건조가공 처리된 전복이 교역을 통해 일본에 전해져 유통되었음을 추측케 한다. 즉 이를 통해 당시 일본 규슈 일대의 여러 세력들이 탐라와의 교역을 통해 탐라복을 수입하여 천황가에 진상하였음을 알 수 있다.
다만, 모리 기미유키[森公章]를 비롯한 일본 측 연구자들은 목간이나 『연희식』에 보이는 ‘탐라복’에 대해 당시 일본이 제주도와 교역을 통해 전복을 수입한 것은 아니라고 보며, ‘탐라복’의 ‘탐라’는 단지 전복의 종류를 뜻하는 이름으로 이해하고 있다. 이를테면 ‘탐라에서 많이 생산되는 전복’이라는 뜻에서 ‘탐라복’이라고 불렀다는 것이다. 조금은 궁색해 보이는 의견이지만, 어쨌든 당시 일본에서 제주도산 전복이 유명했음을 이들 자료를 통해 알 수 있다. 즉 이 자료는 고대 제주도 주민들이 바다 밖의 여러 나라들과 교류함에 있어 중요 교역품으로 전복을 사용하였다는 사실을 확인시켜주고 있는 것이다.
738년, 일본으로 간 신라 상단과 탐라방포
한편, 이외에도 고대 일본 측 사료에는 제주도 전복에 대한 또 다른 기록이 보인다. 바로 「주방국정세장(周防國正稅帳)」이라는 고대 일본 문서가 그것인데, 여기에는 “탐라방포(耽羅方脯)”라는 탐라산 특산물의 이름이 기재되어 있다.
[사진 3] 「주방국정세장」(大日本古文書(編年文書) 권2, 1901)
이 「주방국정세장」이라는 문서는 일본 천평(天平) 10년(738)에 작성된 문서로서, 당시 일본 부령사(部領使) 대재부소판사(大宰府少判事) 제7위하 금부련정마려(錦部連定麻呂)라는 인물이 738년 4월 19일에 주방국(周防國)에 보낸 서찰[牒]이다. 위에서 보듯 ‘탐라방포’는 금부련정마려가 주방국(周防國)에 대금 지출을 요청한 여러 물품 가운데 보인다. 이 대금 지출 요청서는 738년 일본 다자이후[大宰府]에 이첩된 것으로서, 이들 물품은 다자이후에 의해 이때 매입되었다. 다자이후는 고대로부터 일본 규슈 지방 전체를 다스렸던 관청이었는데, 고대 중국과 한반도에서 입국한 사신과 상인을 맞이하는 역할도 하였다.
한편, ‘탐라방포’라는 명칭에서 ‘방(方)’은 곧 나라 혹은 지방을 뜻하고, ‘포(脯)’는 말린 고기를 뜻하는 글자이다. 즉 ‘탐라방포’는 탐라국 혹은 탐라 지방에서 생산된 말린 고기를 의미하는 말이다. 일반적으로 연구자들은 이 탐라방포를 ‘전복을 건조시켜 만든 포’로 이해하고 있는데, 이를 통해 738년 무렵 일본의 다자이후에서는 외부로부터 온 상인들로부터 탐라방포를 구매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이때 다자이후에 들러 탐라방포를 판매한 상인은 누구였을까. 이때 주목되는 것은 같은 「주방국정세장」에 기재되어 있는 탐라도인(耽羅島人) 21명의 존재이다. 문서에 따르면 이들은 738년 10월 21일에 일본 측으로부터 식료를 제공받았다 한다. 결국 같은 문서 상에 보이는 탐라인 21명이 곧 일본 측에 탐라방포를 판매한 사람들이었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이와 관련하여 같은 해 정월에 김상순(金想純) 등이 이끄는 147명의 신라 사신단이 다자이후에 도착하였다는 기록도 주목된다. 이때 신라 상단은 헤이안경에 들어가지 못하고 다자이후에 머물며 일본으로부터 향응을 제공받다가 같은 해 6월 24일에 신라로 돌아갔다고 한다. 그런데 고대에 일본으로 건너간 신라 사신단은 일종의 상단 역할도 하였다고 알려져 있다. 따라서 이때 건너간 신라 사신단도 일본에 체류한 6개월 동안 다자이후에서 다양한 교역 활동을 하였을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그렇다면 당시 탐라가 통일신라의 속국이었음을 고려할 때, 「주방국정세장」에 보이는 탐라인 21명은 738년 김상순 일행과 함께 일본으로 건너가 교역을 했던 고대 제주도 주민들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한편, 「주방국정세장」에 기입된 물품 가운데 4구의 탐라방포 이외에 ‘교역(交易)’이라는 두 글자가 붙어 있는 물품, 즉 ‘교역(交易) 어리료우피(御履料牛皮) 2령’과 ‘교역(交易) 녹피(鹿皮) 15장’ 등도 다자이후에서 신라 상단으로부터 구입한 물품으로 보인다. 어리료우피는 신발을 만드는 데 사용한 소가죽을 뜻하며 녹피는 말 그대로 사슴 가죽을 말하는데, 소와 사슴 가죽은 모두 당시 제주도 지역의 특산품이었다. 결국 738년 일본으로 건너간 김상순 일행은 탐라의 특산물을 가지고 일본 측과 교역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이때의 교역에는 21명의 탐라인들, 즉 고대 제주도 주민들도 참여하고 있었다. 이처럼 고대 일본 자료에 보이는 전복은 지금으로부터 1300여 년 전 통일신라의 상인들과 제주도민들이 고대 제주도의 특산품을 가지고 일본과 교역하였던 사실을 생생히 전해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