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를 건너 일본으로 간 조선의 매[鷹]
작성자관리자
작성일2021-04-29 14:57: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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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를 건너 일본으로 간 조선의 매[鷹]
HK+사업단 HK연구교수 이승민
우리는 흔히 조선시대 한일관계를 생각하면 통신사(通信使)를 떠올린다. 통신사(通信使) 관련 기록물은 현재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어 17~19세기 한일간의 문화교류를 상징하는데, 사실 통신사 외에도 양국 사이에는 다양한 교류가 이루어졌다. 양국 사이의 교류는 물품을 통한 교역으로도 나타나고 있었는데, 그 가운데에는 조선 동물이 일본으로 건너간 경우를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일본 도쿠가와 막부의 8대 쇼군이었던 도쿠가와 요시무네(德川吉宗)는 허준(許浚)의 『동의보감(東醫寶鑑)』을 접한 이후 한반도의 동식물을 광범위하게 조사하는 이른바 대규모의 왜관(倭館) 조사를 명령·실시한 인물로도 잘 알려져 있다. 그 일환으로 편찬된 『약재질정기사(藥材質定記事)』에는 약재 뿐 아니라 조선의 다양한 동식물 그림들이 등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요시무네 이전부터 막부의 쇼군과 주요 인사들은 조선의 다양한 동식물에 호기심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
대군(大君)이 근래에 호화로운 사치가 날로 심해져 진기한 새와 기이한 짐승을 후원에 모아놓고 날마다 미녀와 서로 모여 구경하는데 나라 안의 구경거리가 모자라 다른 나라의 물건을 가져올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 때문에 귀국(조선)에서 살아있는 두루미(野鶴), 살아있는 흰 거위(白鵝), 살아있는 원앙(鴛鴦) 각 두 쌍과 살아있는 고슴도치(蝟) 10마리 및 살아있는 학알(鶴卵, 학의 알) 20개 등을 대군이 쓰시마 도주에게 요청했기로, 도주가 부득이 비선(飛船, 빠른 배)으로 절박한 사정을 고해왔습니다. 값의 고하(高下, 높고 낮음)는 논할 겨를이 없으니 급히 찾아주시면 값은 조정에서 명하는 대로 하겠습니다.
- 『왜인구청등록(倭人求請謄錄)』 1冊, 인조(仁祖) 27년 1월 14일
조선 동물 중에서 가장 빈번하게 일본으로 건너간 것은 매와 말이었다. 특히 매는 양국 관계에서 최고의 선물이자 교역품으로 꼽혔다. 한국에서는 이미 삼국시대부터 왕을 비롯한 지배층들이 매사냥을 즐겼고, 매사냥은 지난 2010년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되기도 했다. 일본에서도 전통적으로 지배층들이 매사냥을 즐겼고 조선의 매를 매우 선호했다고 한다. 일본에서 조선 매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는지는 일요상인(日遙上人)으로 잘 알려진 여대남(余大男)의 사례를 보면 짐작할 수 있다. 여대남은 임진왜란 당시 가토 기요마사[加籐淸正]의 부하에게 납치되어 일본으로 끌려갔는데, 후에 아버지와 주고받은 편지에서 일본에서는 조선의 매를 소중한 영물(靈物)로 여기고 있으니 좋은 매 2마리를 보내주면 히고[肥後] 태수와 쓰시마 도주에게 각각 한 마리씩 바치고 자신이 돌아갈 길을 모색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했다.
생명을 가진 짐승을 함부로 죽이지 말라는 살생금지령[生類憐みの令]이 반포되어 한때 일본 내에서 매사냥이 금지된 적이 있었지만, 매는 여전히 일본 내에서 최고의 선물로 꼽힌 조선 동물이었다. 통신사 예단으로 필요한 매는 경상도·강원도·전라도·충청도·함경도에서 조달되었는데, 사실 강원도와 함경도를 제외한 나머지 지역은 매가 나는 주요 산지는 아니었다. 그럼에도 왜관이 위치한 경상도 등에 많은 수의 매가 할당되어 사행 예단과 교역상의 필요에 충당되었다. 통신사와 문위행이 가져가는 예단 품목 안에 포함되었고, 회사(回賜)·구청(求請)·구무(求貿) 등 다양한 경로를 통해 일본으로 건너갔다. 일본 지배층 내에서 매에 대한 인기와 수요가 높아지면서 조선 매를 구하고 싶다는 요청은 끊임없이 이어졌다. 1650년에는 쇼군의 특별지시라는 명목으로 쓰시마에서 한 번에 50마리의 매를 요청하기도 했고, 1748년 통신사의 경우에는 70여 마리를 선물로 가져가기도 했다. 일본 지배층이 선호한 조선의 매는 일반 매에서부터 해동청(海東靑)·보라매·송골(松鶻) 등 비교적 희귀한 품종에 이르기까지 다양했다. 참매는 해동청·보라매 등 다른 이름으로 불려왔는데, 해동청은 ‘조선의 푸른 매’라는 뜻으로 주변국에서 조선 참매를 일컬은 이름이고, 보라매는 태어난 지 1년이 안 된 것으로 가슴털의 색이 보라색을 띤 데서 유래된 이름이다.
[사진 1] 이시눌(李時訥)의 「응도(鷹圖)」 (일본 相國寺 慈照院 소장)
그런데 매는 성질이 급하고 더위에도 약해서 운송 도중에 죽는 경우가 많았다. 그런데 매는 막부에 진상되는 것이어서 쓰시마에서는 매의 관리에 신중을 기해야만 했고 이러한 매를 전담해서 관리하기 위해 왜관에 응장(鷹匠)이 파견되었다. 당시 왜관 안에는 개시대청(開市大廳) 옆에 응방(鷹坊)이 있어서 여기에서 조선에서 받은 매를 직접 사육하고 관리했다. 왜관 내에서 매의 먹이로 주로 사용한 것은 메추라기였는데, 왜관 밖으로 나와서는 안 되는 일본인들이 왜관 밖으로 나가서 메추라기를 잡는 과정에서 무분별하게 인근 조선 농민들의 밭을 드나들며 황폐하게 만드는 경우도 종종 발생했다.
[사진 2] 변박(卞璞)의 「왜관도(倭館圖)」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사진 3] 「부산포초량화관지도(釜山浦草梁和館之圖)」 (국사편찬위원회 소장)
[사진 4] 「조선도회(朝鮮圖繪)」 (일본 교토대 도서관 소장)
왜관으로 매가 어느 정도 모여지면 본격적으로 일본 본토로 수송되었는데, 매를 안전하게 옮기는 것은 쓰시마에게는 매우 중요한 문제였다. 운송 도중 매가 죽는 경우가 적지 않았고 그렇게 되면 막부에 매를 진상할 때 어려움을 겪을 수 있기 때문이다. 수송에 앞서 매의 상태를 신중히 점검하고 매 먹이 뿐 아니라 바다를 건너는 매가 병에 걸릴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다양한 약재를 함께 싣고 가기도 했는데, 그중에는 사향(麝香)이나 웅담(熊膽)처럼 값비싼 약재로 포함되어 있었다. 쓰시마역사민속자료관에 소장되어 있는 『御鷹覺帳』(1717)에는 매에게 사용하기 위해 준비한 약재의 총 가격이 은(銀) 267匁으로 기록되어 있다. 1702년 쌀 1석이 교토(京都)에서는 은 80匁, 오사카에서는 은 100~110匁에 거래되고 있었다고 하니, 당시 매를 수송하는 데 드는 약값은 최소한 쌀 2~3석을 살 수 있는 가격이었다. 또 약값 외에도 매를 수송하는 데 드는 제반 비용, 즉 매의 먹이 및 약값, 매 운반 담당자의 급료·식량·체류비, 매 수송선의 선임(船賃) 및 임차료, 응롱(鷹籠)을 비롯한 각종 기구 등을 포함한 총 가격인 은 5貫 423匁 7分은 당시 시세대로라면 쌀 50석 이상을 살 수 있는 가격이었다.
[사진 5] 「어응롱도(御鷹籠圖)」
(「朝鮮王より別幅幷兩使自分獻上物諸御役人江之音物仕立方箱臺寸法等之覺」, 『文化信使記錄』 五拾三, 국사편찬위원회 소장 MF0000159, 소장문서번호 104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