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유라시아의 수유(酥油) 이야기 Ⅰ
작성자관리자
작성일2026-01-02 13: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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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유라시아의 수유(酥油) 이야기 Ⅰ
최소영(HK연구교수)
수유(酥油)는 양이나 소, 야크 등의 젖에서 락토스와 카제인, 수분을 제거한 나머지 부분으로, 약 99%가 지방으로 이루어진 유제품이다. 주로 중앙아시아나 티베트, 몽골, 인도 북부 등의 지역에서 생산되어 식재료로 사용되었다. 일반 버터와 달리 상온에서 오래 보관이 가능하며 발연점이 높아 요리에도 사용할 수 있다. ‘油’ 자 때문에 버터기름이라고 번역하기도 한다. 같은 한자를 쓰고 ‘소유’라고 읽기도 한다.
“수유”와 똑같은 제조 방법으로 생산되고 성분도 동일한 유제품이 언제 어느 지역에서 처음 만들어지고 소비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인도에서는 고대부터 카제인과 유당을 제거한 정제한 유제품을 산스크리트어 ‘ghṛta’에서 비롯한 명칭인 ‘기(ghee)’ 라고 불렀으며 주로 요리에 사용하였는데 이것이 수유와 같은 종류였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한문 기록에서 수유가 처음 등장하는 것은 원대(元代)로, 이는 몽골이 티베트를 세력 하에 넣은 후 몽골-티베트 교류가 활발해지면서 티베트의 수유가 몽골 조정에서 사용되기 시작하여 기록에 남게 된 것이라고 생각된다. 티베트어로는 버터를 마르(mar)라고 하는데 종류에 따른 상세한 명칭 구별은 보이지 않는다.

[사진] 청해(靑海) 티베트인들의 수유
티베트인들이 차를 널리 음용한 것은 12세기 이후라고 생각되지만 오랫동안 차는 고위층과 승려들의 전유품이었다. 이 시기 칭하이(靑海) 지역의 티베트인들이 송(宋)과 이른바 차마교역을 활발히 하였고 이 차의 일부가 대량으로 중앙티베트로 들어갔을 것이다. 14세기 중반, 사꺄파(sa skya pa)와 몽골의 지배를 무너뜨리고 중앙티베트에서 세력을 장악한 쟝춥 걜챈(byang chub rgyal mtshan)은 차와 함께 버터가 아니라 다만 당(糖)을 섭취한 것을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몽골제국 시기에 티베트에서 버터를 넣어 열량과 영양을 높이는 방식이 널리 퍼졌고 잘 알려진 것은 분명해 보인다. 홀사혜(忽思慧)의 저명한 궁중음식 저서인 『음선정요(飮膳精要, 1330)』 “서번차(西番茶)” 항목에는 다음과 같은 기사가 있다.
서번차(西番茶)는 본토에서 나왔으며 맛이 쓰고 떫은데 수유를 넣어 달인다.
수유차에 넣는 차는 주로 품질이 좋지 않은 찻잎을 저렴하게 구입하여 썼다고 하며 따라서 차 만으로는 쓰고 떫은 맛이 났을 것이다. 티베트인은 여기에 수유를 잘 섞어서 마셨다. 수유의 제작법에 대하여 원대의 위구르인 학자 노명선(魯明善, 1271-1368)이 편찬한 『농상의식촬요(農桑衣食撮要)』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반응고된) 유즙을 통이나 항아리 속에 담아서, 집 기둥 가에 안치한다. 대껍질이나 뽕나무 가지를 엮어 작은 고리 두 개를 만들거나 혹은 작은 목판 두 개에 한 개씩 구멍을 뚫어 사용해도 좋은데, 나무 기둥이나 나무 곁의 아래위에 두고 갈포 끈으로 두 개의 작은 고리나 목판을 묶어 고정하고, 별도로 하나의 목찬(木鑽)을 만들어서 아래쪽 둥근 판자에 (목찬의 송곳을) 꽂는다. (목찬의) 절반은 (유즙의) 통속에 들어가게 하고 나머지 절반은 아래위의 고리 속에 끼워서 두 개의 고리 사이에 위치한 목찬에 가죽 끈이나 줄을 두 바퀴 감고서 양손으로 전후로 목찬을 끌어당기면서 돌려 구멍을 내듯이 하면 거품이 생겨나는데, (거품이 생겨나면) 차가운 물속에 따라 부어서 응고시키고, 많이 모이게 되면 도리어 솥 안에 넣고 약한 불에 고아서 위로 뜬 탄 거품을 제거하면 곧 좋은 버터가 만들어진다.(『농상의식촬요 역주(譯註)』 pp.163-164)
또한 『음선정요』는
우유에서 깨끗이 응고된 부분을 취해서 달이면 수(酥)가 된다.
고 하였다. 이렇게 정제된 수(酥)를 찻잎을 끓인 물에 넣어 수유차로 음용하였다. 이는 티베트인들의 식생활의 중요한 부분이었다. 티베트인들은 이 차에 대해, 뜨거운 찻물에 수유를 넣어 세게 저어 섞어 먹어야 했으므로 ‘휘저어 먹는 차’라는 뜻의 ‘자숩마(ja bsrubs ma)’라고도 부르는데 보통 단순히 ‘티베트 차’라는 뜻의 ‘뵈자(bod ja)’라고 칭한다.

몽골제국 당시 몽골인들은 차를 상용(常用)하지 않았으나 『음선정요』는 궁중에서 대칸을 비롯한 황실 성원의 식생활을 적은 것이므로 당시 몽골 최상층에서는 차를 마시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수유는 주로 티베트에서 생산되고 대량의 양젖이나 야크젖이 필요하므로 제조가 쉽지 않아 몽골인들이 조공품으로 받았다고 생각되지만 원대 티베트에서 몽골 조정에 이를 보냈는지는 티베트 측의 기록이 전혀 없어 알 수 없다. 그런데 고려의 사료에 고려측이 몽골 조정에 수유를 보낸 기록이 몇 가지 남아있다.
충렬왕 정유23년(1297) 11월 무인일에 상장군 김연수를 원나라에 보내 인삼 및 탐라의 수유(酥油)를 헌납하였다.(『고려사(高麗史)』 31권 세가31 충렬왕4)
충렬왕 신축27년(1301) 12월 병인 초하룻날에 호군 최연을 원나라에 보내 새매를 바쳤으며 또 사재윤(司宰尹) 정량(鄭良)으로 하여금 수유(酥油)를, 상호군 이백초로 하여금 인삼을 가지고 가서 헌납하게 하였다. (『고려사(高麗史)』 3권 세가32 충렬왕5)
충선왕 기유원년(1309) 12월 갑인일에 사신을 원나라에 보내 수유(酥油)를 바쳤다.(『고려사(高麗史)』 33권 세가33 충선왕1)
충혜왕 임신2년(1332) 가을 7월 신묘일에 원나라에서 사신을 보내 탐라의 수유(酥油)를 요구하였다. (『고려사(高麗史)』 37권 세가37 충정왕 원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