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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의 향약(香藥), 소합유(蘇合油) 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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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일2025-12-29 19:23: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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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의 향약(香藥), 소합유(蘇合油) Ⅱ



HK + 사업단 HK연구교수 신동훈



<한반도와 소합유>


  한반도의 소합유 기록은 952년(광종 3) 신라국 소명왕(照明王)의 황후 대통황후(大樋皇后)가 일본 나라현에 있는 사찰 하세데라(長谷寺)에 33개의 보물을 기증하였다는 문서(『곤자쿠모노가타리슈(今昔物語集)』에서 확인된다. 33개의 보물 가운데 “소합(蘇合)”이 포함되어 있다. 시기상으로 볼 때 여기서 소합은 고체 형태로 추측된다.


  이후 소합유에 대한 기록은 조선에 들어와 확인된다. 앞서 언급했듯이 소합유는 약재로 사용되었다. 『구급이해방(救急易解方)』에 따르면, 소합원이 중풍에 사용되었고, 『동의보감(東醫寶鑑)』에서는 기병을 치료한다고 했으며, 『의람촬요(醫林撮要)』에서는 나쁜 기운을 받아서 아픈 것, 정신이 흐려지는 병 등을 치료하는 데 효과가 좋다고 했다. 소합유는 단독 복용 보다는 침향⋅사향 등 다른 재료들과 섞어서 혼용했으며, 이러한 기타 재료들과 섞어서 환으로 만든 것이 소합환이었다.


[그림2] 소합향

출처 : 바이두


  조선에서 생산되지 않는 약재는 의관을 보내 중국에서 구매해왔다. 소합유도 조선에서 생산되는 물건이 아니었기에, 주로 명⋅청과의 교역이나 왜의 진상을 통해 입수했다.


  먼저 조선 전기 소합유 입수 사례를 살펴보자. 조선 전기에는 주로 황제의 하사품이나 왜의 진상품으로 조선에 들어왔다.


  태종 4년, 조선은 황제에게 약재가 부족하다는 것을 이유로 약재 매매 허용을 요청했다. 그러자 황제는 조선이 요청한 약재 품목과 수량을 확인하여 허락해주고, 조선의 국왕이 쓸 것을 별도로 내려주었다. 이때 황제가 하사한 소합유는 10냥 쯤이었다(『태종실록』 권8, 태종 4년 11월 1일 기해). 태종 6년 조선은 황제로부터 18종의 약재를 하사받았는데, 그 가운데 소합유도 포함되어 있었다(『태종실록』 권12, 태종 6년 12월 28일 정미).


  한편, 왜로부터도 소합유는 조선으로 전래되었다. 세종 5년 큐슈[九州] 총관(摠管)이었던 원의준[源義俊, 시부카와 요시토시(渋川義俊)]은 대장경 하사에 대한 답례로서 토산물을 바쳤는데, 그 가운데 소향유 3근이 포함되어 있었다(『세종실록』 권21, 세종 5년 7월 11일 기축). 같은 해 9월 큐슈[九州] 전 총관(摠管) 원도진[源道鎭, 시부카와 미쓰요리(澁川滿賴)]도 대장경 하사에 대한 답례로서 토산물을 바쳤는데, 소향유 5근을 바쳤다(『세종실록』 권21, 세종 5년 9월 18일 병신).


  흥미로운 것은 세종 5년 당시 일본국의 축주(筑州) 관사(管事) 평만경(平滿景)도 5월과 9월에 각각 토산물을 바쳤는데, 소합유는 포함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리고 당시 평만경의 답례품은 원의준⋅원도진의 답례품보다 전반적으로 소략하고 빈약했다. 세종 7년 황제는 조선의 요청에 따라 소합유 1근을 포함한 약재들을 하사했다(『세종실록』 권30, 세종 7년 11월 7일 임인). 세종 8년에는 원도진이 소합유 2근을 포함한 토산물을 진상했고(『세종실록』 권34, 세종 8년 12월 14일 계유), 세종 9년 대마도 수호 종언륙(宗彦六)은 소합유 등의 토산물을 바쳤고, 대마도 내의 작은 세력이었던 종정징(宗貞澄)도 토산물을 바쳤는데 원도진의 그것이 비해 소략했다(『세종실록』 권36, 세종 9년 6월 29일 병술).


  이러한 점은 소합유가 선물로서 갖는 위상이 상대적으로 높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소합유는 항상 진위논란 존재했다는 점을 상기시켜보면, 상대적으로 높은 지위의 있는 사람이 자신의 진정성을 보여주기 위해 진품이라 판단되는 소합유를 보냈을 것으로 생각된다. 조선이 명에 약재 거래를 요청했을 때 황제는 약재를 하사했는데, 그 가운데 소합유가 포함되어 있었다는 점도 진위 논란으로 인한 진품 소합유의 높은 위상을 방증한다.


  소합유의 진위 논란이 있었기에, 조선은 황제에게 소합유를 요청했던 것으로 판단된다. 앞서 언급한 사례 이외에도, 성종 6년 태감 강옥은 한명회에게 소합유를 보내줬는데(『성종실록』 권56, 성종 6년 6월 5일 임오), 이는 사행단으로 중국에 갔던 한명회의 요청에 의한 것이었다. 성종 12년에도 조선의 사행단은 황제에게 소합유⋅용뇌 등의 약재를 요청했고, 황제는 조선의 요청에 따라 내탕고에 있던 소합유를 하사했다. 이 사례에서 소합유는 신뢰성의 문제를 내포하고 있었고, 신뢰성의 문제로 인해 역설적으로 외교 무대에서 고부가가치를 갖게 되었던 것이었다(『성종실록』 권128, 성종 12년 4월 19일 계해 ; 『성종실록』 권129, 성종 12년 5월 9일 계미 ; 『삼탄집(三灘集)』 권11, 서(序), 「上黨府院君燕京使還詩序」).


  『패관잡기(稗官雜記)』에 따르면, “소합유⋅곽향(藿香)⋅독활(獨活)⋅유향(乳香)⋅사향(射香) 같은 것은 진짜가 아닌 것이 가장 많았다”라고 하면서, 진품을 구매하기 위한 중종 대 일화를 소개하고 있다. 진품을 구매하기 위해 명 예부에 공문을 보내 태의원의 의생을 소개받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의생도 상인과 결탁해 진품을 판매하지 않았다고 한다. 앞서 설명한 바와 『패관잡기』의 사례를 통해 알 수 있듯이, 진품 소합유를 구별하는 것은 상당히 어려운 일이었다.


  그런데 『패관잡기』 사례에서 주목되는 것은 소합유를 시장에서 구매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어느 시점에서부터 황제로부터 하사를 받지 못하게 되었고, 조선 스스로 시장에서 진품 소합유를 분별해 구매해야 했음을 보여준다.


  이후 인조⋅영조 대의 『승정원일기』의 기록들을 살펴보면, 조선은 중국에서 서각(犀角)⋅주사(朱砂)⋅육계(肉桂)⋅황련(黃連)⋅사군자(使君子)⋅용뇌(龍腦)⋅천축황(天竺黃) 등과 함께 소합유(蘇合油)를 매매했다(『승정원일기』 인조 4년 10월 8일 정미 ; 『승정원일기』 영조 20년 1월 14일 임진 ; 『승정원일기』 영조 26년 11월 19일 무오 ; 『승정원일기』 영조 29년 10월 30일 신해). 영조 대에 10년간 3차례 구매하고 있다는 것으로 보아, 조선 사회에서 꾸준히 사용되었던 약재였던 것으로 보인다. 진위 논란이 있는 약재였기 때문에 의원을 보내 구매하도록 했다.


  소합유를 비롯한 이상의 약재들을 구매해야 했던 이유는 조선에서 꾸준히 사용되었지만, 생산되지 않을 뿐 아니라 조선 내에서 구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진위 여부가 있었기 때문에 시장에서 구매하는 것이 조심스러웠을 가능성도 있으나, 사료에서 전하는 정황으로 보았을 때 물리적으로 조선 내에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중국에서 구매해야 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다시 말해 조선 사회에서 소합유는 희소한 약재였던 것이다.


  조선 사회에서 소합유가 희소한 약재였다는 것은, 태종 대 고의적으로 소합유를 관에 바치고 대가를 받은 사건에서 잘 드러난다. 이 사건은 전 판원주목사 권완(權緩)과 지신사 유사눌(柳思訥)이 공모하여, 권완이 갖고 있던 소합유 3근을 관에 바치고 면주 66필과 목면 5필을 받은 사건이었다. 지신사 유사눌은 자신의 지위를 이용하여 불필요한 소합유를 수납하는 데 영향을 끼쳤다. 그리고 여기에 왜인 평도전(平道全)도 가세해 권완의 소합유를 자신이 바치는 것으로 위장했다(『태종실록』 권31, 태종 16년 3월 8일 경자). 평도전은 일을 성사시키기 위해 동원되었을 뿐, 실상은 소합유를 재물로 바꿔 권완과 유사눌이 나눠 갖기 위함이었다(『태종실록』 권31, 태종 16년 3월 12일 갑진 ; 15일 정미 ; 16일 무신). 이 사건은 태종의 비호로써 수납되었던 소합유는 이숙번에게 내려졌고, 유사눌과 권완은 유배에서 외방종편으로 감형되었다가 얼마 안 가 유사눌은 복직되었다(『태종실록』 권31, 태종 16년 3월 20일 임자 ; 5월 23일 갑인 ; 『태종실록』 권32, 태종 16년 10월 1일 기미).


  소합유를 시장에서 처분하지 않고 관에 바치는 것은, 소합유가 고급 약재로서 왕실에서 주로 사용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당시 소합유의 값을 비싸게 치를 수 있는 곳은 왕실이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들이 고위관직임에도 불구하고 소합유를 굳이 번거로운 과정을 통해 재물로 바꾸려 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소합유의 가치를 알고 온전한 값을 책정해줄 곳은 왕실뿐이었기에, 이들은 지신사의 권한을 이용해 소합유를 관에 바쳤던 것이다.


  이러한 모습은 소합유 사용이 왕실과 상류층에 국한되었을 가능성을 암시한다. 하지만 기록의 부재로 더 이상의 역사상은 알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