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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상(糖霜)으로 본 동아시아 설탕의 역사 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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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일2025-10-22 19:05: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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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상(糖霜)으로 본 동아시아 설탕의 역사 Ⅰ

 

HK + 사업단 HK연구교수 이완석

 


  식물은 광합성을 통해 자당(蔗糖, sucrose)을 생성하여 저장한다. 특히 사탕수수(甘蔗)‧사탕무‧과일 등이 자당의 함유량이 높다. 이러한 식물을 압착‧분쇄하여 당즙(糖汁)을 수집하고 여과하여 불순물을 제거한 후 달여서 결정화하여 설탕(雪糖, sugar)을 생산한다. 당상(糖霜)은 현대의 얼음설탕[氷糖]과 마찬가지로 가장 결정이 크고 순도가 높은 설탕 제품을 말한다. 약 2500년 전 동인도에서 사탕수수로 설탕을 만드는 방법이 탄생하였을 것으로 추정한다.


<사탕수수>

출처: 위키피디아


  대략 전국(戰國)시대 경에 중국 창장(長江) 이남 지역에서 사탕수수를 재배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전국 초(楚)나라 때 시집인 『초사(楚辭)』에서 “자장(柘漿)”이 등장하는데, 이는 당시 사람들이 사탕수수를 재배하여 그 즙을 음용했음을 짐작케 한다. “자장”은 사탕수수를 압착해서 만든 즙을 의미할 수도 있고 혹은 그 즙을 가열하여 만든 일종의 시럽일수도 있다. 이후 후한(後漢) 시기 남해현(南海縣, 현 광둥성) 출신인 양부(楊孚)는 중국에서도 설탕이 제조되었음을 보여주는 기록을 남겼다.


사탕수수는 원근에 모두 있다. 교지(交趾)에서 나는 사탕수수가 특히 향긋하고 좋으며, 전체적으로 두껍고 넓은 부분이 없어 그 맛이 지극히 균질하다. 둘레는 수 촌(寸)이고 길이는 1장(丈) 남짓이며, 자못 대나무와 닮았다. 베어서 먹는데 맛이 달다. 짜서 즙을 내어 이당(飴餳)을 만들고 이를 당(糖)이라 이름 지었으니 더욱 진귀하다. 다시 달이고 말려서 얼음처럼 응고시킨 후 깨트려 바둑알처럼 만들어 먹는다. 입에 넣으면 녹으니 당시 사람들이 석밀(石蜜)이라 하였다.

양부(楊孚) 『이물지(異物志)』

  대략 한(漢) 이후부터 당(唐)까지 중국에서는 사탕수수에서 추출한 자당을 햇볕에 말려 응고시킨 설탕덩어리인 석밀을 섭취하였다. 당 태종(太宗) 시기 인도에서 설탕 제조법을 배워 옴으로써 중국의 설탕 제조 기술이 크게 발전하였다.


마게타(摩揭它)는 일명 마가타(摩伽陀)라고도 하는데 본래 천축(天竺)의 속국이다. … 정관(貞觀) 21년(647)에 처음으로 사신을 보내서 천자와 왕래하였다. … 태종(太宗)이 사신을 보내어 오당법(熬糖法)을 취하고 곧 양주(揚州)로 하여금 여러 사탕수수를 바치게 하여 즙을 짜내서 작은 조각과 같이 만들었더니 색과 맛이 서역(西域)의 것보다 훨씬 좋았다.

『신당서(新唐書)』, 권221, 「서역전(西域傳)」상(上)

  본래 마가다국은 기원전 6세기에서 기원전 1세기까지 인도 갠지스 강 중류에 있었던 왕국으로 당보다 훨씬 이전 시기에 사라진 국가이다. 여기에서는 왕국이 존재했던 현 인도 북동부 비하르 주 일대를 일컫는 이름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중국의 제당 기술이 발전해 가는 과정에서 당 대력(大曆) 연간(766~779)이 되면 획기적인 설탕 제품이 출현한다. 바로 당상(糖霜)의 출현이다.


당상(糖霜)은 일명 당빙(糖冰)이다. 복당(福唐), 사명(四明), 번우(番禺), 광한(廣漢), 수녕(遂寧)군에서 나오는데 오직 수녕의 것이 으뜸이다. 당 대력 연간에 추화상(鄒和尙)이라는 승려가 있었는데 어디에서 온 자인지 알지 못했다. 흰 나귀를 타고 산산(傘山)에 올라 초가집에서 살았다. … 하루는 나귀가 산 아래 황씨(黄氏)의 사탕수수 묘목 밭을 망쳤다. 황씨가 배상을 요구하니 추화상이 “당신은 아직 자당을 밀봉하여 상(霜)을 만드는 법을 모른다. 이익이 마땅히 10배이니 내가 당신에게 말해주어 배상을 대신해도 되겠는가?”라고 하였다. 시험해보니 과연 믿을 만 하였다. 이때부터 그 방법이 전해졌다.

왕작(王灼), 『당상보(糖霜譜)』

  이 일화에 등장하는 추화상에 대해 북송(北宋) 『밀재필기(密齋筆記)』에서는 “이승(異僧)”이라고 하였고, 명(明) 『천공개물(天工開物)』에서는 “서역승(西域僧)”이라 하였으므로, 당상의 제조법이 전적으로 중국에서 독자적으로 개발한 방법이었다고 보기 어려울 듯하다.


   

<얼음설탕>

출처: 위키피디아


  송대 설탕 제조법은 전문화되고 상업화되어가며 발전하였다. 사탕수수만을 재배하는 자호(蔗戶)와 당상을 제조하는 당상호(糖霜戶)가 등장하였다. 사탕수수와 설탕은 전국에 유통되었고, 사회 상류층에서부터 일반 도시민에게까지 많은 환영을 받고 소비되었다. 예를 들어 남송(南宋) 고종(高宗)은 금(金)나라 사신이 천축사(天竺寺)에 예배 갈 때, 침향(沈香)과 주과(酒果) 그리고 유당(乳糖)을 하사하였다. 또한 송대 관사에는 밀전국(蜜煎局)이 설치되어 중양절이나 제야(除夜) 같은 절일에 관인과 백성에게 각종 당밀화과(糖蜜花果)를 공급하는 일을 관장하였다. 과거 합격자들이 찹쌀‧멥쌀‧인삼‧복령‧백출 등과 백설탕을 섞어 만든 “오향고(五香糕)”를 즐겨 먹으며 자신의 관도(官途)가 계속 승진하기를 기원하는 풍습이 있었다.


  원대(元代)에 들어와서도 중국의 설탕 생산량은 증가하였다. 이때 제조법에서도 또 다른 발전이 두드러지는데, 바로 와분(瓦盆)을 이용하여 당밀(糖蜜)을 제거하여 순도를 더 높이는 방법이 등장하였다. 또한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에 의하면, 카안의 궁정에 있었던 바빌로니아 출신 제당 기술자들이 복건(福建) 지방 설탕 생산자에게 목탄(木炭)을 이용한 불순물 중화법을 가르쳐 주었다고 한다. 명대(明代)에 들어서면서 4가지의 기술 혁신이 발생하였다. 첫째, 명대에 수직으로 설치된 2개의 롤러를 통해 사탕수수를 압착하는 기기, 즉 당차(糖車)가 등장하였다. 이를 통해 압착에 사용되는 인적‧물적 자원이 절감되었다. 둘째, 석회(石灰)를 사용하는 중화법이 보편적으로 사용되어 설탕의 품질이 향상되었다. 셋째, 하나의 아궁이에 3개의 솥을 품(品)자 모양으로 걸어 사용함으로써 사탕수수 즙을 달이는데 연료를 절감하였다. 마지막으로 진흙을 이용한 표백법이 개발되었고, 이는 백설탕의 생산으로 이어졌다. 이러한 4가지 기술 혁신은 중국을 세계 유수의 설탕 생산국으로 만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