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물의 역사(History of Things)를 위한 실마리 : 삼목(杉木)과 귀주성 동남부의 지역사회 (1)
작성자관리자
작성일2024-09-05 13:3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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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물의 역사(History of Things)를 위한 실마리 : 삼목(杉木)과 귀주성 동남부의 지역사회(1)
정철웅(명지대)
다양한 용도로 사용된 삼목
목재는 오랫동안 중요한 건축 재료로 사용되어 왔다. 이외에도 선박, 종이, 관 등의 생산과 제작에도 많은 목재가 소비되었다. 중국 역사에서 이처럼 여러 방면에서 널리 사용된 나무 중 하나가 바로 삼목(杉木, Cunninghamia lanceolata)이다. 호남성(湖南省) 장사(長沙)의 마왕퇴(馬王堆) 고분에서 출토된 관곽(棺椁)의 재료는 삼목이었다. 이 고분은 전한(前漢) 고조(高祖) 2년(기원전 186)에 사망한 장사국(長沙國)의 승상(丞相) 이창(利倉)의 무덤으로 알려져 있으니, 무려 2,200년 전부터 중국인은 삼목을 사용한 셈이다.
[사진 1] 삼목
출처: 바이두
그런데 진(晋) 나라 곽박(郭璞, 276~324)의 『이아(爾雅)』에 나오는 삼목에 대한 설명을 보면, 삼목의 이용이 단지 건축이나 관목에 국한되지 않았다.
“삼나무는 소나무와 비슷하고, 강남(江南) 지역에서 생장하는데, 선박과 관재(棺材)로 사용할 수 있으며 땅에 묻는 기둥으로 사용해도 썩지 않는다... 의사들이 그 마디를 끓여서 즙을 내 피부병이 있는 발 부위에 담그면, 특히 효험이 있다.
위 문장으로 미뤄, 진 나라 무렵이 되면 많은 사람이 삼목의 또 다른 효능을 알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이런 탓인지, 중국 사서(史書)에서는 일찍부터 삼목과 관련된 다양한 종류의 언급이 등장하는데, 그 몇 가지를 언급하면 다음과 같다. 아마도 중국 최초의 본격적인 물품 감정서인 『신증격고요론(新增格古要論)』에는 “삼목 한 가운데 꽃무늬가 있는데, 그 미세한 무늬는 마치 꿩의 깃털처럼 매우 현란하며, 조악한 형태의 무늬마저도 매우 아름답다”라고 기술되어 있다. 삼목에 대한 이런 찬사 외에도, 송대(宋代) 서긍(徐兢, 1191~1153)의 『선화봉사고려도경(宣和奉使高麗圖經)』에는 삼목을 종잇장처럼 얇게 잘라 만든 부채인 삼선(杉扇)도 등장한다. 심지어 삼목을 식용한다는 기록도 있는데, 명대 포산(鮑山)이란 인물이 저술한 『야채박록(野菜博錄)』은 이렇게 적고 있다.
“삼목은 일명 삼재(杉材)라고 하며, 또한 삼균(杉菌)이라고도 한다...깊은 계곡에서 생장한다. (삼목)은 제법 (키가) 높고 크며, 억세고 곧은 나뭇잎에서 (다시) 가지가 자라는데, 마치 침이 달린 잎과 같고 뾰족한 측백나무와도 유사하다. 또한 비자나무와도 비슷하다... 삼나무 잎을 먹는 방법은 어린잎을 따서 뜨거운 물에 데쳐 쓴맛을 제거한 후, 기름과 소금을 (섞는 것인데, 이렇게 하면) 식용에 적당하다.”
이외에, 이시진(李時珍, 1518~1593)의 『본초강목(本草綱目)』에는 삼목으로 만든 숯에 유황을 배합해 봉화대의 신호용 연료나 총기의 화약으로 사용할 수 있다는 언급도 등장한다.
삼목 수요의 증가
이처럼 삼목이 다양한 용도로 쓰였지만, 명대 이전까지는 인공조림(人工造林)을 통해 삼목을 공급할 정도는 아니었다. 그러나 16세기에 이르러 삼목의 수요가 급증했는데, 특히 가정 연간(1522~1566)과 만력 연간(1573~1620) 시기가 그 절정이었다. 이 시기는 연구자들이 2차 상업혁명의 시대라고 부를 정도로 명 경제가 번영했던 탓에, 고급 목재의 수요가 증가했을 것이다.
이런 수요 증가를 증명하듯, 정덕(正德) 10년(1515) 한 해에 안휘성(安徽省) 휘주부(徽州府)의 세공(歲供) 물품 가운데 여러 종류의 삼목이 무려 49,600근(根)에 달했으며, 삼목으로 된 판자도 1,600괴(塊)나 되었다. 이런 내용이 기록된 가정(嘉靖) 『휘주부지(徽州府志)』에 의하면 가정 9년(1530)과 가정 36년(1557)에도 삼목의 세공이 거의 동일한 규모로 행해졌다. 이 무렵 삼목의 생산이 많지 않았던 휘주부는 결국 강서성(江西省)과 절강성(浙江省)에서 삼목을 구매해 세공에 충당해야만 했다.
16세기의 경제발달이라는 전반적인 상황 외에, 명대에는 유난히 황궁의 화재가 빈번했다는 사실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명대 276년 동안 남경(南京)과 북경(北京)의 황궁에서 거의 5~6년마다 한 번씩 화재가 발생했다. 이를테면 (三大殿)인 봉천전(奉天殿), 화개전(華蓋殿), 근신전(謹身殿)에서는 영락(永樂) 19년(1421), 가정 36년(1557), 만력(萬曆) 25년(1597)에, 그리고 건청궁(乾淸宮)에서는 영락 20년, 성화(成化) 11년(1475), 정덕 9년(1514), 그리고 만력 24년(1596)에 각각 화재가 발생했다.
따라서 예로부터 중요한 삼목 생산지였던 사천(四川), 광서(廣西), 강서(江西), 호광(湖廣) 등지에서 삼목이 공급되었다. 이러한 지역은 황궁 건설에 필요한 소위 ‘황목(皇木)’ 조달에 따른 부담이 많았는데, 만력 연간의 인물인 왕덕완(王德完, 1554~1621)의 상소(上疏)는 그런 정황을 잘 말해준다.
“대체로 사천에 부과된 남·삼목(楠·杉木)이 5,600 근괴(根塊)로서, (이에 따른 비용을) 은(銀)으로 환산하면 350만 냥(兩)입니다. 호광(湖廣)에 본래 부과된 남·삼목은 5,560 근괴로서, (그 비용 역시) 약 210만 3천 냥입니다. 귀주(貴州)에 본래 부과된 (남·삼목)은 2,790 근괴로서, (그것도) 약 96만 8천여 냥에 이릅니다.”
만력 연간 당시, 임진왜란으로 조선 파병 비용이 약 582만 2천여 냥이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위 세 지방의 삼목 채벌 비용 660만 냥은 사실상 엄청난 액수다.
더구나 황목의 규격은 보통 길이가 약 19미터, 나무의 근부(根部), 즉 하부의 둘레는 약 1.4미터, 나무 위쪽 둘레는 약 50센티미터 이상이어야만 했다. 그러므로 벌써 명 중엽 정도에 이르면 깊은 산중이 아니면 이런 종류의 소위 ‘외목(桅木)“을 구하기 어려웠을 뿐 아니라, 비용도 이전보다 더 들었으며, 벌목에 따른 위험성도 컸다. 또한 16세기 말이 되면 남목(楠木)이 희소해진 탓에 대체제로서의 삼목의 수요가 더욱 증가했다. 삼목의 이러한 집중적인 수요(intensification of demand) 증가가 삼목 생산 지역에 어떤 영향을 끼쳤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