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근대 동아시아의 만능 접착제, 교(膠) 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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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2024-06-21 13:39: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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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근대 동아시아의 만능 접착제, 교(膠) Ⅱ
HK+ 사업단 HK연구교수 김병모
우리나라의 교 문화가 언제 시작되었는지, 교에 관한 명칭이 어떻게 정착‧분화되었는지 분명치 않다. 다만 삼국시대에 이미 구교‧미록교 등 몇몇 교가 출현하여 교 문화의 토대를 형성했다. 일본 쇼소인에 소장된 ‘신라양가상묵(新羅楊家上墨)’‧‘신라무가상묵(新羅武家上墨)’ 등도 신라에서의 교 제조를 상정케 한다. 아울러 아교‧미록교 등의 명칭 출현으로부터 중국식 명명법 수용의 일면도 읽을 수 있다. 고려시대에도 아교‧녹각교‧황명교‧백교‧괴교(槐膠) 등 다양한 교 명칭이 출현하였으며, 아울러 우피(牛皮)‧나피(騾皮) 등 제조원에 관한 기록 역시 보다 다양화‧구체화됐다.
[사진 1] 황갈색의 반투명 녹각교
조선시대에는 더 다종다양한 토대 위에서 교 문화가 전개됐으며, 우피교‧녹각교‧마피교(馬皮膠)‧여피교(驢皮膠)‧민어교‧석수어교(石首魚膠)‧연어피교‧오교(螯膠)‧황교(黃膠)‧봉취교(鳳嘴膠)‧어타(魚駝) 등 10여 종이 넘는 교가 제조됐다. 여피교는 당나귀 가죽으로, 민어교와 석수어교는 각각 민어와 조기의 부레로, 오교와 황교는 커다란 게의 딱지와 집게발로, 어타는 바다고기나 모래무지의 뼈로 제조했다. 특히 어타는 재료를 뽕나무 잿물과 섞은 후 뽕나무를 태워서 가열‧제조하는 다소 특이한 제조법으로 만들어졌다. 게다가 그릇 모양의 틀에 교의 액을 넣어 굳힌 후 그릇을 만들거나 혹은 편으로 만들어 물건을 만드는 데 사용됨으로써 소용처 역시 특이한 면모를 내보였다. 뿐만 아니라 난교(鸞膠)와 같이 거문고 등의 줄을 잇는 특수한 접착제도 출현시켰다.
조선시대에는 교의 생산 지역도 상당히 광범위했다. 우피를 위주로 한 아교의 생산은 전국 각지에서 전개했으며, 특히 중앙의 군기시와 선공감 등에는 아교장을 두어 생산을 전문화했다. 해산물을 위주로 한 어교 역시 충청‧전라‧경상‧경기‧황해‧평안‧함경 등 각도의 바다 및 강 인접 상당수 지역에서 생산되었으며, 녹각교 역시 충청‧경상‧전라‧강원‧평안도 등 광범위한 지역에서 생산되었다.
[사진 2] 어교 제조용 민어 부레
조선시대 교는 약재로서 상당량이 소비되었지만 채색과 포수 등을 비롯하여 병기 및 목기 등의 제작 과정에서 접착제로 보다 많이 소비되었다. 일례로 1901년 의정부찬정 탁지부대신서리 이용익이 의정부의정 윤용선에게 진연 준비 중 필요한 935근의 아교를 청구하였다. 함께 청구한 안료의 양 역시 천여 근에 이르고, 안료와 동일한 항목에 포함시켜 청구서를 작성하고 있기 때문에 아교 중 상당량이 채색에 사용되었다고 볼 수 있다. 1902년 고종의 60세 생일 진연을 위해 의정부찬정 탁지부대신 김성근이 의정부참정 김규홍에게 청구한 아교가 469근에 이르렀으며, 함께 청구한 안료 역시 수백 근에 달했다. 특히 왕실 초상화의 어용에는 내의원에 있는 최상품 아교를 주로 사용했으며, 대부분 약재로 소비된 녹각교 역시 왕의 명정과 재궁 등에 금분으로 글씨를 쓰거나 대렴 과정에서 관 표면에 분채 장식을 할 경우 내의원에 있는 최상품을 가져다 사용했다.
조선시대에는 교 종류의 확대뿐 아니라 교 관련 기록도 수천 건에 이를 정도로 크게 증가했다. 『조선왕조실록』‧『승정원일기』‧『비변사등록』‧『의궤』‧『각사등록』‧각종 지리지 및 법령자료 등에 공납지역‧유통량‧소용처 등과 관련된 내용을 상세하게 기록했다. 어교는 각 군현의 궐공 항목에, 아교와 녹각교는 각 군현의 약재 항목에 분류‧분정함으로써 수취 체계 역시 보다 체계적으로 관리되었다. 이는 조선시대에 이르러 교가 국가적 관심을 받는 물품의 하나로 등장했음을 나타내주는 동시에 교 문화 발전의 상당 부분이 국가에 의해 주도되었음을 시사한다.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교 문화 발전이 다종다양한 토대 위에서 실질적 발전 단계로 진입했음을 말해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