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경,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어 문화가 되다 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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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2024-01-25 14:40: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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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경,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어 문화가 되다 Ⅱ
고려대 역사교육과 변성현
일본에서는 16세기 전반 하비에르 신부가 상납한 안경이 가장 오래된 안경으로 알려져 있다. 당시 신부의 눈이 네 개라는 소문이 퍼지고, 이를 확인하기 위해 수천 명의 사람이 몰려드는 등 사람들에게 안경은 충격으로 다가왔다. 이후 17세기부터 안경의 수입이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포르투갈은 추방되기 이전까지 꾸준히 일본에 안경을 들여왔으며, 1637년에는 코안경 38,241개를 들여왔다. 네덜란드 역시 1643년 막부 진상용 안경 160개를 들여왔다. 중국은 17~19세기 동안 매년 수백~수천 개의 안경을 들여왔으며, 1768년에 남경(南京)에서 온 선박은 1만여 개를 일시에 들여오기도 했다.
1615년에서 1624년경에 하마다 야효에가 자바에서 안경 제조법을 습득하고 귀국하여 나가사키에서 제조법을 가르쳤다. 이를 전수받은 이쿠시마 도시치는 안경 외에도 망원경‧확대경을 제작하여 일본의 광학 산업에 크게 이바지하였다. 또한 제조법을 다시 전파하여 전국에서 안경을 생산해 냈으며 이후 일본의 안경은 빠르게 대중화되었다. 안경의 대중화는 요코하마 거류지에서 찰스 워그맨(Charles Wirgman)이 창간한 『재팬 펀치』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1862년에 그려진 삽화(좌측)에서는 에도 시대의 마부 두 사람이 안경을 쓰고 즐거워하고 있고, 그들이 끌고 가는 말도 안경을 쓰고 있다. 또 그로부터 10년 뒤 그려진 삽화(우측)에서도 평범한 서민들이 어른부터 어린아이, 갓난아기, 심지어 개와 고양이까지 안경을 쓰고 있다.
조선에서 안경은 임진왜란 이후 본격적으로 유입된 것으로 보인다. 안경과 관련된 최초의 기록은 조선 중기 이호민의 「안경명(眼鏡銘)」(1606)에서 확인할 수 있으며, 비슷한 시기 이수광은 『지봉유설(芝峯類說)』에서 임진왜란 당시 조선에 파견된 심유경(沈惟敬)과 겐소(玄蘇)가 안경을 착용한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
화인(華人)(중국인)이 양각명결(羊角明潔)(밝고 깨끗한 양의 뿔)을 사용해 두 눈 모양으로 만드는데, 눈이 어두운 사람이 눈에 쓰고 글을 보면 잔글씨가 크게 보이고, 흐릿한 것이 밝게 보인다. 이것을 안경이라 부른다.이호민, 「안경명」소설에 “안경: 노년에 책을 보면 작은 글자가 보인다.” 하였다. 듣자니 예전에 중국 장수 심유경과 왜국의 중 겐소는 모두 노인이었지만 안경을 써서 잔글씨를 읽을 수 있었다고 하는데, 우리나라에서는 일찍이 본 적이 없는 것이었다.이수광, 『지봉유설』
특히 새로운 문물과 더 넓은 세계를 경험한 사행들의 안경 관련 기록이 주목된다. 중국으로 파견된 사행들이 안경을 접한 대표적인 장소는 북경의 유리창(琉璃廠)이다. 홍대용은 『을병연행록(乙丙燕行錄)』에서 “안경 파는 포자(鋪子)는 각색 안경을 좌우에 무수히 걸었다.”고 서술했고, 『연원일록(燕轅日錄)』에는 “식사 후에 유리창에 이르러 허다한 안경점을 구경하고 돌아왔다.”는 기록이 등장한다. 또 일본산 안경의 조선 유입은 왜관무역과 에도막부와의 외교 의례와도 관련이 있었다. 『전객사일기(典客司日記)』에서 막부가 조선에 올린 예물 중에 ‘금피안경일괘(金皮眼鏡一掛)’나 ‘금갑안경일개(金匣眼鏡一箇)’, ‘금혁과안경일도(金革裹眼鏡一擣)’ 등의 품목이 보인다. 또한 1763년 통신사행에 참여한 인사들이 막부로부터 받은 회사례(回謝禮)에도 안경이 포함됐다.
조선에서도 경주에서 산출된 수정으로 ‘경주 남석안경’이 제작되었다. 다만 강세황의 「안경(眼鏡)」에 기록되어 있는 것처럼 생산된 안경은 품질과 수량에서 미비한 점이 있었다. 때문에 조선에 유통된 안경은 대부분 수입품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조선 후기 안경은 가격이 낮아지고 보급이 활성화되어, 거의 모든 계층이 패용했다. 강세황은 『표암유고(豹菴遺稿)』에서 “근래 책 읽는 사람이 소중히 여길 뿐 아니라, 부녀자들이 바느질할 때라든가 직공들이 정교한 것을 만들 때에 50이 못된 사람들이 모두 벌써 사용한다.”라고 언급했다.
안경은 관료들에게도 선정(善政)을 위한 도구로서 중요했다. 조선 후기 남용익은 지방관이 자신에게 안경을 빌리러 왔을 때 쓴 편지 말미에 다음과 같은 시를 남겼다.
백성들의 어려움을 살피고 아전의 실정에도 환하니, (察得民艱燭吏情)
사또는 정사를 잘 처리하여 명성이 자자하네. (使君爲政已能聲)
그래도 유랑하는 백성의 집 두루 보살피지 못함을 걱정하여, (猶憂未遍逃亡屋)
다시 내 안경을 빌려 밝게 보라고 하고 싶네. (更借壺翁眼鏡明)
남용익, 『호곡집(壺谷集)』 권8, 「지주차안경, 희서간미(地主借眼鏡, 戲書簡尾)」
안경은 특히 지식인 계층에게 중요한 의미를 가졌다. 박지원이 「양반전」에서 “책을 읽는 사람이 선비고, 벼슬에 종사하는 사람이 대부이다”라고 ‘사(士)’를 정의한 것처럼, ‘사’는 독서를 통해 지식을 습득하고 세상을 이해했다. 또 이를 기반으로 저술활동을 함으로써 자신의 생각과 정서를 표현했다. 시력 문제로 독서를 할 수 없는 것은 ‘사’로서의 존재 의의를 상실하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안경을 통해 시력 저하를 해결함으로써 더 나은 독서가 가능하여졌고, 그 결과 새로운 지식의 창출도 가능해졌다. 정약용은 두 아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나쁜 시력에도 불구하고 저술에 몰두할 수 있었던 것은 안경 덕이라고 밝혔다. 안경의 주 소비층은 지식인 계층이었고, 이는 책을 통해 지식을 수용하고 창출해내는 이들의 정체성 때문이었다. 따라서 안경은 지적 욕구의 상징이며, ‘사’로서의 정체성을 보여주었다.
또한 신분제가 존재하는 조선 사회에서 어떤 안경을 쓰는지가 사회적 지위를 드러내게 됐다. 안경 코다리 부분을 화려하게 조형한 것은 한·중·일 모든 안경에서 관찰된다. 안경집도 위신재의 역할을 수행했다. 비단 끈으로 장식되어 허리춤에 차고 다닐 수 있게 제작되기도 하였고, 비단 재질에 화려한 자수를 새기기도 했다. 또 어피(魚皮)가 최고급 안경집 재료로서 여겨졌다. 이는 안경 예절로 인해 안경을 드러낼 수 없는 것을 대신해서 안경집을 통해 자신의 경제력이나 지위를 과시한 것이었다. 아울러 윗사람 앞에서 안경 쓰는 것을 꺼리는 문화가 정착되었다. 이규경의 「애체변증설」을 보면, 존귀한 사람이나 연장자 앞에서 안경을 쓸 수 없는 풍속이 19세기에 형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혁신과 진보, 지식의 상징인 안경을 존장 앞에서 끼는 것은 그것을 지나치게 자랑하는, 유교적 ‘예’ 관념에 어긋나는 것이라고 여긴 것이다.
이국에서 전래된 상품인 안경은 교역과 자체 생산의 과정에서 다양화되고 품질이 개선되고, 비단 상류층뿐만 아니라 전 계층에서 널리 패용되었다. 안경은 직역을 수행하고, 지식을 탐구하는 데 기여하였으며. 때로는 지위를 드러내는 등의 다양한 상징성을 가지고 물품을 뛰어넘어 동아시아의 문화로 자리 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