若松兎三郞, 그는 은인인가 원수인가
작성자HK+관리자
작성일2021-06-22 16:1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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若松兎三郞, 그는 은인인가 원수인가
동국대학교 경찰행정학부 임영성
우리나라에서 목화(木花)의 재배는 1363년(공민왕 12년) 문익점(文益漸)이 원나라에 서장관(書狀官)으로 건너갔다가 얻은 목화씨를 붓두껍 속에 숨겨 가지고 와, 그의 장인 정천익(鄭天益)과 함께 재배에 성공하면서 시작되었다. 이때 문익점이 도입한 목화의 품종은 ‘아시아면’이었으며, 개항 이후에는 흔히 ‘재래면(在來綿)’이라 칭해졌다. 이처럼, 옛날부터 우리나라에서 농민들이 심어 가꿔왔던 면화의 품종은 재래면이었다. 이 재래면은 의료용 솜이나 완충재 등으로 사용되기에는 적합했으나, 공업용으로는 그렇지 않았다. 이와 비교하여, 목화의 대표적인 품종 중 하나이자 세계적으로 가장 보편적인 ‘육지면(陸地綿)’은 수확량이 20~30% 더 많았으며, 섬유 가닥이 길어서 현대적인 면제품을 생산하기에 알맞았다. 그래서, 일제강점기 당시의 솜옷이나 무명옷은 기본적으로 재래면이 아니라 미국산 개량종 육지면으로 만들어졌다. 덧붙여, 육지면은 주로 미국을 비롯한 북아메리카에서 재배되었다.
우리나라에서의 육지면 재배를 살펴보기 전에 그 배경을 먼저 이해해야 한다. 일본의 재래면은 탄력성이 부족할 뿐만 아니라, 섬유가 두꺼워 방적 원료로 사용되기가 어려웠다. 때문에, 당시 일본의 방적 사업은 해마다 증가하는 경향을 보였음에도 불구하고, 일본 재래면의 한계 탓에 수입에 의존하고 있었다. 그래서, 일본의 방직업은 외부 요인에 의하여 쉽게 동요하기가 수월한 상황이었다. 따라서 일본은 자체적으로 생산할 수 있는 원료를 얻기 위하여, 수입해 온 미국의 육지면 품종 재배를 일본 내에서 수년간 시도하였다. 그러나 육지면의 발육 부분에서는 비교적 좋은 성과를 거두었지만, 개서기(開絮期, 덜 익은 목화의 열매가 벌어지는 시기)에 비가 많이 내리는 일본의 기후와 적합하지 않아 거듭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
이와 같은 흐름 속에서 목포의 일본 영사 若松兎三郞(1869~1953)은 “면의 개서기에 조선은 강우가 적어, 미국 종을 재배하면 혹시 성공할지 모르겠다.”라고 판단하였으며, 1904년 봄에 일본 농상 무성 농사시험장으로부터 미국 종과 기타 13종의 면 종자를 얻어 왔다. 이후, 若松兎三郞의 주도하에 고하도(高下島, 전라남도 목포시 유달동에 위치한 섬)에서 육지면의 시험 재배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그리고 고하도에서의 시험을 통하여 한국에서의 육지면 재배 가능성이 증명되자, 1905년에 일본 내에서 ‘면화재배협회’가 설립되었다. 일본 농상 무성 농사시험장 기사 安藤廣太郞이 재시험 업무를 맡았으며, 시험재배지는 목포, 자방포(무안), 영산포, 나주, 광주의 5개소가 선정되었다. 재시험 결과, 육지면이 한국의 풍토에 적응하고, 재래종에 비해 수확량이 많음이 확인되었다. 이에 따라, 전라남도에는 30개소의 종자원(種子園)이 설립되었고 육지면 종자를 재배하게 되었다. 이후 1906년 3월 대한제국 정부는 국내의 육지면 재배를 면화재배협회에 위탁하였다. 이는 통감부(統監府) 권업모범장(勸業模範場)에서 면화재배협회의 위탁사업을 감독하는 방식이었다. 권업모범장은 1906년 경기도 수원에 설치되었고, 1906년 6월 10일에 권업모범장 목포출장소가 개설되면서 본격적으로 육지면 재배의 보급이 추진되었다. 1910년 국권 피탈이 이루어진 후 설치된 조선총독부는 1906년부터 시행된 육지면의 시험재배 성과를 통해 남쪽 지방이 재배의 적지임을 확인하고, 면작 제1기 계획을 수립하였다. 그 내용은 1912년부터 6년간 면작 면적을 10만 정보에 이르도록 하는 것이었다. 1912년 3월 寺內正毅 총독이 면작 장려에 관한 훈령을 남부 6도와 권업모범장에 보내면서 육지면 재배는 급속도로 확대되었다. 육지면의 생산면적이 늘어나기 시작한 후 1916년에 이르러 육지면의 재배면적이 재래면을 넘어서게 되었다. 그리고 전라남도가 육지면의 최대 생산지가 되면서, 이는 일제강점기 목포항의 발전과 기능에도 영향을 주었다.
목포항(木浦港)은 1897년 10월 1일에 국내에서 네 번째로 개항하였던 전라남도 목포의 항구이다. 일제강점기 당시의 목포항은 일본 및 중국과의 교역 통로였으며, 곡물, 면화, 우피 등을 일본으로 공출하는 거점이었다. 또한, 항구 주변에는 외국인의 상업활동과 거주를 허용된 각국 거류지가 설치되었다. 특히, 육지면과 관련하여 일제강점기 목포항은 육지면 확산의 거점이 되었고 일본으로 육지면을 공급하는 중심 창구 역할을 하였다. 특히, 조선과 비교적 근접한 거리에 있으며 방직산업이 발달한 大阪(오사카)과 神戶(고베) 지역으로 대부분의 육지면이 발송되었다. 동양방직(東洋紡織) 등 대형 섬유 기업들이 大阪에 본사를 두고 있었고, 神戶에는 종연방직(鍾淵紡織)의 본사가 있었다. 따라서, 전라남도에서 생산되는 육지면은 목포항을 통해 대형 방직공장이 있는 일본 내 도시로 보내지는 흐름이었다.
[사진 1] 전남사진지(1917) ‘면화회착(綿花廻着)’
위는 〈전남사진지(1917)〉에 실려 있는 ‘면화회착(綿花廻着)’ 사진으로, 일본의 목화 수탈과 관련이 깊다. 일본으로 보내질 면화 뭉치들이 목포항에 쌓여 있는 모습을 보아, 일본이 목포항을 통하여 많은 양의 면화를 가져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밖에도, 목포의 4대 일본 영사이자 마지막 영사였던 若松兎三郞은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천일염(天日鹽)’을 보급한 인물이기도 하다. 지금 우리가 먹고 있는 천일염은 전통적인 방식으로 만든 소금이 아니다. 1900년대 초까지 우리는 바닷물을 졸여서 만든 자염(煮鹽)을 먹었다. 덧붙여, 천일염은 자염보다 싼값에 대량으로 생산할 수 있었다. 若松兎三郞은 목포로 오기 전에 중국 후베이성(湖北省)에 있는 사스(沙市)에서 일본 영사로 근무했었다. 양쯔강(揚子江) 유역의 둥팅호(洞庭湖) 북쪽에 있는 사스는 면화의 산지로 알려진 곳이었기 때문에, 若松兎三郞은 이미 면화에 대하여 잘 알고 있는 상태에서 목포로 왔었던 것이었다. 목포의 일본 영사로 1902년 7월 10일부터 1906년 1월 31일까지 근무한 이후에, 그는 조선총독부 소속 부산 부윤(府尹), 인천 쌀콩 거래소 시장 등으로 일하였다. 그리고 1927년 일본 교토로 돌아간 그는 1940년대부터 재일 조선인들의 인권 보호를 위하여 노력하였다. 예를 들면, 그는 조선인들이 교회당에서 자유롭게 예배를 볼 수 있도록 일본 경찰을 설득하기도 하였다.
국내에서의 若松兎三郞와 관련된 일부 기사에서는 육지면을 한국에 보급한 공로를 높게 평가하여 그를 ‘제2의 문익점’이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에 대한 비판도 역시 존재한다. 국내에서 육지면이 각지에 보급된 이후에 목포항은 면화 수탈의 대표적인 항구가 되었으며. 육지면 보급은 식민지 지배정책과 밀접하다. 또한, 목포대 사학과 최성환 교수는 “1903년에 목포 부두 노동운동이 치열하였을 때, 야쿠자들이 무안감리서(務安監理署)를 습격하여 경찰들을 구타하였을 뿐만 아니라 야쿠자들의 심복들을 감옥에서 빼 나간 일이 발생하였다. 당시 그 일을 비호(庇護)한 인물이 바로 목포의 일본 영사 若松兎三郞였다.”라고 주장하였다.
그렇다면, 若松兎三郞은 우리에게 은인일까 원수일까? 그가 우리나라의 의생활 및 식생활 문화에 큰 영향을 주었다는 점과 일본에서 재일 조선인들을 위하여 노력하였다는 점 그 자체는 마땅한 사실이므로 인정해야 한다. 하지만, 육지면 재배의 목적과 과정 그리고 결과는 모두 일본의 식민지 농업정책과 관련이 밀접하기 때문에 그 본질이 그저 순수하였다고 볼 수 없다. 그리고 若松兎三郞이 일본 영사로 근무하던 시절에 일본인 옹호에만 앞장섰다는 점과 일본의 이익을 위하여 성실하게 일하였던 관료였다는 점 등을 생각하면, 그를 마냥 ‘제2의 문익점’이라고 칭송하며 우호적으로만 평가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