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의 인삼, 해삼(海蔘) 이야기
작성자관리자
작성일2022-08-01 15:06: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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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의 인삼, 해삼(海蔘) 이야기
HK+사업단 HK연구교수 이해진
‘바다의 인삼’이라고도 하는 해삼은 독특한 식감을 지니고 있어 지금도 중화요리에서 귀하게 쓰이는 식재료이다. 과거 전통시대에는 약재로도 사용되었다. 해삼은 전근대 동유라시아 지역 대부분의 해역에서 채취되었으며, 주로 건해삼의 형태로 가공되어 유통되었다. 한국에서 생산되는 해삼은 색깔에 따라 홍해삼・청해삼・흑해삼 등으로 분류하기도 하나 모두 같은 종이며, 선호하는 먹이나 서식지에 따라 피부의 색이 달라진 것뿐이다.
[사진 1] 건해삼
출처: 경남 수출농수산식품 사이트 https://www.agri-korea.com/kor/sub/product_view.jsp?seq=1077&category1=200050&category2=200050040
동유라시아 지역의 해삼 소비
해삼을 날로 먹는 풍습은 동남아시아나 남태평양 일대에서 두루 발견되지만, 건해삼의 가공은 발해만과 한반도 북부, 연해주 일대의 해민들이 구황 식품으로 활용하기 위해 개발한 것이었다는 설이 있다. 한편 일본 헤이안 시대의 사전인 『왜명류취초(倭名類聚抄)』와 의학서인 『의심방(醫心方)』은 수대에 최우석(崔禹錫)이 집필한 『식경(食經)』을 인용하여 ‘해서(海鼠)’의 약효를 적고 있다. 이를 통해 본디 중국에서는 해삼을 주로 약재로 활용하였음을 알 수 있다.
조선의 박물지도 해삼을 다루고 있다. 『물보(物譜)』와 『재물보(才物譜)』는 해남자(海男子)・토육(土肉)・흑충(黑蟲) 등의 별칭과 순우리말인 ‘뮈’ 또는 ‘미’라는 호칭을 적었다. 『물명고(物名考)』는 “바다에서 살며 빛이 검고 길이가 4・5촌, 배가 있고 입과 귀는 없다. 온몸에 혹 같은 것이 퍼져 있고 오이와 비슷하다”라고 서술하였다. 서유구(徐有榘)의 『전어지(佃漁志)』는 “해삼은 성이 온(溫)하고 몸을 보비(補脾)하는 효력이 인삼에 맞먹기 때문에 이러한 이름이 생겼다”라고 적었다. 조선에서도 해삼이 주로 약재로 취급되었음을 알 수 있다.
식재료로서는 원나라 말기에 찬술된 『음식수지(飮食須知)』에 ‘해삼(海蔘)’이 처음 등장한다. 1330년경 원의 홀사혜(忽思慧)가 지은 『음선정요(飮膳正要)』에는 해삼이 등장하지 않으나, 내륙의 식문화에서 유래한 젤라틴 식품이 다수 수록되어 있다. 즉 몽골 지배시기에 내륙의 식문화가 중국으로 보급되는 과정에서 젤라틴 식품의 일종인 해삼도 식재료로 정착하였음을 알 수 있다.
1638년 요가성(姚可成)이 저술한 『식물본초(食物本草)』는 다음과 같이 해삼을 설명하였다.
해삼은 동쪽과 남쪽의 바다에 산다. 생김새는 누에 같고 색은 검으며, 몸에는 돌기가 많이 솟아 있다. 길이가 5~6촌인 것은 겉과 속이 모두 깨끗하고 맛은 극히 싱싱하고 좋으며, 빼어난 보익 효과가 있어 요리 중 가장 진귀하다. 길이 2~3촌인 것은 배를 가르면 안에 모래가 많아 다 긁어내기 어렵고 맛 또한 떨어진다. 현재 북방인들은 당나귀 가죽이나 말의 음경으로 모조품을 만든다. (중략)
해삼은 맛이 달고 짜며, 平하고 독이 없다. 원기를 보충하는데 주효하며, 오장육부를 살찌우고 삼초(三焦, 육부[六腑]의 하나로 소화・흡수・배설과 관련된 기관)의 화열(火熱)을 제거한다. 오리고기와 같이 삶아 먹으면 노겁(勞怯)하고 허손(虛損)한 각종 질병에 효능이 있다. 돼지고기와 같이 삶아 먹으면 폐가 허해져 나오는 기침을 다스린다.
약효와 더불어 식재료로서의 가치와 맛을 평가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 시기 해삼의 용도가 확대되었음을 알 수 있다. 해삼이 본격적으로 중국에서 식재료로 활용되기 시작하자 16세기 후반부터 수요가 급증하였으며, 17세기 전반에는 톈진[天津]에서 갑작스럽게 가격이 치솟아 사료에서 이야기하는 바와 같이 위조 해삼이 등장하였다고 한다.
해삼의 수요는 청대에 더욱 증가하였다. 18세기에 해삼은 제비집, 전복, 상어 지느러미 등과 함께 최고급 식재료로 나열되었으며, 만한전석에서도 새끼돼지 통구이, 제비집, 상어 지느러미 요리에 이어서 제공되는 귀한 음식이었다. 1765년 조학민(趙學敏)이 지은 『본초강목습유(本草綱目拾遺)』는 선학의 기록과 식견을 채집해 해삼에 대하여 상세히 기록하였다. 그중 1598년에 간행된 두문섭(杜文燮)의 『약감(藥鑒)』을 인용한 부분은 다음과 같다.
해삼은 성경(盛京)과 펑톈[奉天] 등에서 나는 것이 제일로, 검은색이며 살은 차지고 돌기가 많다. 요삼(遼蔘) 또는 자삼(刺蔘)이라 부른다. 광둥[廣東]의 바다에서 나는 것은 이름이 광삼(廣參)이고, 색이 노랗다. 푸젠[福建]에서 나는 것은 표피는 희고 육질은 메지며, 많이 거칠고 돌기가 없다. 비조삼(肥皂參)이라 부른다. 광삼(光蔘)은 저장성[浙江省] 닝포[寧波]에서 나는 것으로, 크고 연하고 돌기가 없으며 과피삼(瓜皮蔘)이라 부르는데 품급은 더 떨어진다.
여기서는 중국 연안의 해삼 중 돌기가 많은 보하이만[渤海灣]의 것을 제일로 여기며, 그다음은 광둥과 푸젠 일대, 그리고 가장 낮은 급으로는 닝포에서 채취한 것을 들고 있다. 그리고 산지에 따른 각각의 명칭과 색, 돌기의 유무 등을 설명하고 있다.
해삼과 조선의 바다
중국의 해삼 수요 증가는 조선의 골칫거리가 되기도 하였다. 아래의 『영조실록』 10년(1734) 5월 6일 기사에서 그 정황을 확인할 수 있다.
무릇 정축년에 곡식을 운송(을병대기근 이듬해인 1697년에 청의 강희제가 조선의 요청에 따라 양곡을 지원한 일)한 이후로 당인(唐人) 중에서 해로를 잘 알고 있는 자들이 해삼을 채취하기 위하여 매양 여름과 가을의 계절이 바뀔 때 해서(海西)를 왕래하기를 해마다 반복하였는데, 오는 자들이 더욱 많아져서 배가 몇백 척이나 되는지 알 수 없었다.
이처럼 조선 영해에 출몰하는 황당선(荒唐船)의 도항 목적이 주로 해삼 채취였으며, 그 빈도가 높았기에 조정에서 대책을 강구하는 상황이었다.
조선 바다 전역에서 생산된 해삼은 대청무역의 물품 중 하나이자 은 부족을 대신하는 주요 잡물이었지만, 예단 지급 이외의 거래는 금지되었다. 하지만 현지에서는 때때로 밀무역이 이루어졌다. 1806년에 함경감사로 부임한 홍의영(洪義榮)의 『북관일기(北關日記)』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적혀 있다.
신이 북쪽으로 행차할 때 회령과 경원 두 곳에서 개시(開市)하는 것을 보면 해삼 1종은 금물(禁物)이 되어 매매하지 못하였습니다. 저들이 매양 다른 금물에 대해서는 애초에 항의할 엄두도 안 내는데, 해삼의 경우는 욕심이 대단합니다. 듣자니 5, 6매를 손에 쥐고 몰래 호인 객관에 들어가면 저들이 청포(靑布) 1필로 앞다투어 사 가는데, 시가의 10배나 된다고 합니다. 저들이 이처럼 욕심을 내는 것은 소문에 비단 신발을 붙이는 풀을 반드시 해삼으로 만들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따라서 우리나라가 청나라 사신에게 음식을 대접할 때 해삼과 홍합을 주는데, 모두 해삼으로 대신 받아서 1매라도 아끼니 귀한 보물과 다름이 없습니다. 북해의 해삼은 모두 슬해(瑟海)에서 생산되는데 일절 바다에서 엄금하니, 우리나라 사람들은 감히 몰래 슬해의 해삼을 채취하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해삼이 거의 멸종되어 갑니다. 슬해는 이미 그들 영역 안에 있어 해삼의 이익을 독점하고 있습니다.
블라디보스토크의 이명(異名)이 해삼위(海蔘威)였듯 과거 슬해라고 불린 아무르만 일대는 해삼의 주요 생산지였다. 여기서는 연해주의 호인들이 해삼을 ‘비단 신발을 붙이는 풀’의 재료로 활용하였기 때문에 북관개시의 금지 품목임에도 암암리에 높은 가치로 거래하고 있음을 말하고 있다. 이러한 가운데 슬해의 해삼 채취를 호인들이 독점하고 있으며, 조선의 어선은 출입하지 못하였다고 한다.
일본의 해삼 수출
일본에서는 712년에 편찬된 『고사기(古事記)』에 ‘해서(海鼠)’가 등장하며, ‘고(こ)’라는 독음이 붙어 있다. 천손강림(天孫降臨) 신화 속에서 아메노우즈메노미코토[天宇受賣命]가 물고기들을 모아 신의 아들인 니니기노미코토[瓊瓊杵尊]를 섬길 것을 명령하자 다른 물고기들은 모두 따르기로 맹세하였는데, 오로지 해삼만이 입을 다물고 대답하지 않자 분노한 아메노우즈메노미코토가 칼로 입을 베어버렸다고 한다.
헤이안 시대의 『왜명류취초』는 해삼의 일본 명칭은 ‘고[古]’ 또는 ‘이리코[伊里古]’라고 하며, “거머리와 닮았으나 그보다 크다”고 적었다. 에도 시대의 백과사전인 『화한삼재도회(和漢三才圖繪)』, 그리고 『본조식감(本朝食鑑)』이나 『일본산해명산도회(日本山海名産圖繪)』 등의 식재 도감도 해삼을 소개하였다.
일본의 해삼 채취는 고대부터 시작되었다. 733년에 집필된 『이즈모국풍토기[出雲國風土記]』는 해삼 산지를 소개하고 있으며, 927년에 편찬된 『연희식(延喜式)』은 지방의 백성들이 조정에 건해삼과 함께 창자로 만든 젓갈을 공물로 납부하였다고 적었다.
다만 본격적인 해삼 채취가 이루어진 것은 17세기 말부터였다. 본래 일본은 나가사키[長崎]로 입항하는 중국・네덜란드 상인에게 생사와 견직물을 매입하는 대가로 금・은을 수출하였으나, 17세기 말에 고갈이 가시화되자 에도 막부가 수출을 제한하고 대체품을 찾기 시작하였다. 이때 주목을 받은 것이 바로 해산물이었다. 중국에서 고급 해산물의 수요가 높아지면서 막부와 각 번은 해산물을 상품화하여 재정을 충당하였으며, 특히 사쓰마번[薩摩藩]은 동북 지역의 현지에서 해산물을 몰래 매입하여 류큐[琉球]를 통해 중국으로 밀수출하기도 하였다.
중국의 해삼 수요를 충당한 지역으로는 동남아시아도 꼽을 수 있다. 16세기 후반부터 해적이 기승을 부리던 술루 제도에서는 각지에서 납치된 노예들이 해삼 채취와 가공에 동원되었는데, 그 수는 2만 명 정도에 달하였다. 이 지역의 해삼은 필리핀의 마닐라로 들어가 중계 무역을 통해 중국으로 유입되었으며, 그 양은 최대 600여 톤에 이르렀다. 마카사르에서도 가장 활발한 때에는 400여 톤의 해삼을 중국으로 수출하였는데, 이는 일본의 4~5배를 상회하는 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