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유라시아 물품 문명 문화사

세계 물품학의 최고 거점 연구단으로 거듭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칼럼

column

[연구진 섹션]

조선에 유행한 만주의 특산물 초피[담비 가죽]

  • 작성자HK+관리자

    작성일2022-06-15 13:34:31

    조회수1969

조선에 유행한 만주의 특산물 초피[담비 가죽]


강원대학교 사학과 교수 한성주


  전근대 만주 지역에는 세 가지 보물(滿洲三寶)이 있었다고 한다. 그것은 인삼(人蔘[산삼(山蔘)]), 동주(東珠[진주(珍珠)), 초피(貂皮[담비 가죽])였다. 담비는 그 종류가 많은데, 담비 중에서도 최고급 모피로 평가받는 것은 순흑초피(純黑貂皮)로, 순흑초피는 ‘검은담비 가죽’을 말한다.


  ‘검은담비[黑貂]’는 한반도, 홋카이도, 캄차카 반도, 만주, 시베리아의 침엽수림과 몽골에 서식하고 있는데, 현재 북한에서는 천연기념물(‘보천검은돈’, ‘삼지연검은돈’, ‘백암검은돈’)로 지정하여 보호되고 있다. 


[사진 1] 흑룡강 부근의 초피, 강원대 김창호 선생님 사진 제공


  ‘검은담비 가죽’은 모피 중에서도 최고가의 사치품으로, 조선시대에는 정3품 이상만이 사용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조선과 명(明)나라 모두 초피가 유행하면서 그 수요가 급증하기 시작했다. 조선과 명나라에서는 방한용으로 관료들에게 초피를 지급하였는데, 조선에서도 초피를 이용한 갖옷[초구(貂裘)]를 지급하기도 하였다. 특히 조선의 갖옷은 명나라 사신도 보물로 여길 정도였다. 조선과 명나라의 사회경제적 성장은 사치품이었던 초피에 대한 일반인들의 수요를 증가시켜 조선과 명나라에서 초피가 유행하기 시작하였다.


  국가에서 비록 초피(貂皮)와 서피(鼠皮)의 공물(貢物)을 줄였으나, 폐단이 오히려 제거되지 않은 것은, 풍속이 사치를 숭상하여 복식(服飾)을 반드시 초피(貂皮)와 서피(鼠皮)로 사용하기 때문입니다. 조사(朝士)로서 관계(官階)가 4품에 승진되면 종3품과 서로 어울리므로, 반드시 초피이엄(貂皮耳掩)을 착용(着用)하며, 또 모구(毛裘)는 노인들에게 해당하는 것인데, 나이 젊은 부녀(婦女)들도 모두 초구(貂裘)를 입는가 하면 이것이 없으면 다른 사람과 모이기를 부끄럽게 여겨, 수십 명의 부녀들의 모임에는 한 사람도 입지 않은 자가 없습니다. 


- 『성종실록』 권57, 성종 6년 7월 14일 신유 2번째기사 -

[사진 2] 여자상의류 갖저고리[초구(貂裘)], 조선시대, 국립민속박물관 소장


[사진 3] 남바위[난이(暖耳)·이엄(耳掩)], 조선시대, 국립민속박물관 소장


  초피가 유행하기 시작했다는 것은 그만큼 초피의 공급과 수요 역시 많아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담비의 개체수 증가뿐만 아니라 포획 기술의 발전과 더불어 초피에 대한 상품화가 진행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고려시대에도 여진인이 초피를 바친 기록이 보이지만, 조선시대만큼 그 수량이 많지는 않았던 것 같다. 특히 세종이 고려 때 초피의 귀천에 대해 묻자, 최윤덕(崔潤德)이 ‘전조(前朝)에는 초피가 극히 귀하였다’고 한 것으로 보아 고려 말에도 초피가 상당히 귀한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조선시대가 되면 초피 착용에 대한 금령(禁令)을 여러 차례 내릴 정도로 민간에서도 초피 착용이 일상화되기 시작하였다. 여러 차례 초피 착용에 대한 금령이 내려졌다는 것은 역설적이게도 조선 조정에서 백성들 사이에 초피가 유행하는 것을 막지 못하였음을 잘 보여준다.


  담비가죽[貂皮] 60벌을 들이라고 명했다. 이때에 상품을 내리는 것이 절도가 없었고, 궁인(宮人)들이 다투어 사치를 서로 숭상하여 담비 가죽으로 치마를 만드는 사람까지 있었으니, 담비가죽 값이 매우 뛰어올라 한 마리의 값이 면포 10필에 이르렀다. 


- 『연산군일기』 권46, 연산 8년 10월 8일 정미 2번째기사-


  공경과 사대부의 집에는 많은 첩(妾)을 두어 출입할 때 교자를 타고, 상인의 아내는 남보다 아름다운 옷을 입어 공공연히 초피(貂皮)를 입으므로, 귀천(貴賤)의 차등이 혼동되고 존비(尊卑)의 차서가 없어져, 교만하고 자긍하여 풍화가 퇴폐해졌다. 

- 『중종실록』 권17, 중종 8년 2월 6일 을사 5번째기사 -

  당시 명나라에서도 초피 유행이 번지자, 만주 지역에 거주하는 여진인은 순흑초피 30장을 지니지 않으면 중국에 입조(入朝)를 하지 못하게 하였다. 조선에서도 두만강 유역의 여진인이 질 좋은 초피를 바쳐야만 조선에 상경할 수 있도록 하였다.

  그런데 조선의 평안도와 함경도는 초피 산지로 인식되어 공물로 지정되었음에도, 그 생산량은 적었고 상품의 질이 좋지 않았다. 따라서 공납과 진상을 위한 질 좋은 초피는 지금의 만주에 거주하는 여진인들로부터 구입할 수밖에 없었고, 여진인은 그 대가로 조선의 우마(牛馬)와 철물(鐵物)을 받으려고 하였다.


  사실 압록강·두만강 가까이 거주하고 있던 여진인들 역시 자신들보다 먼 지역[深處]에 거주하는 여진인으로부터 초피를 가져오고 있었다. 털이 길고 조밀하며 유연하고 부드러운 흑초피는 그 주산지가 흑룡강(黑龍江) 일대의 수목지대였기 때문에 대부분의 초피를 이곳에서 들여와 조선과 명나라에 되파는 중계 무역을 했다고도 볼 수 있다. 그리고 이 초피들은 조선의 변경이라고 할 수 있는 함경도 6진 지역에서, 평안도 만포(滿浦)에서, 그리고 여진인들이 내조하여 머무르는 서울의 야인관(野人館, [북평관(北平館)])에서 매매되었다.


  이미 세종 때에 평안도에는 흥판자(興販者)라고 불리는 초피나 인삼으로 장사하는 사람들이 있었으며, 중종 때에는 평안도의 변방 백성들이 농우(農牛)와 농기(農器)를 가지고 여진인들이 오는 만포에 가서 모물(毛物)을 무역하되 기탄이 없을 정도였다. 서울에 온 여진인들을 감독하던 감호관(監護官)이나 서울에서 통역을 담당하던 여진통사(女眞通事) 역시 초피 무역에 나섰다. 함경도 6진 지역 역시 백성들이 공납을 위해 금령을 어기고 철물과 우마로 여진들과 초피를 교환하고 있었다. 조선의 북도에는 또한 이익을 도모하는 흥리인(興利人)과 모리자(謀利者)라 불리는 사람들이 구름처럼 모여서 우마와 철물로써 초피를 구하기를 그치지 않았다.

  이러한 초피 무역의 성행에는 장사치들과 변민들뿐만 아니라 금물을 단속하고 변경을 지키는 변장(邊將)과 수령들도 일조하고 있었으며. 심지어 변방의 수령이 전면에 나서서 여진과의 초피 무역을 주도하기까지 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수령·변장 등은 중앙의 재상들과 연결되는 구조적인 문제점을 가지고 있었다.


  매양 진읍(鎭邑)에 제수되는 사람이 있으면 올 때에는 부탁이 모여들고 이미 부임하면 간독(簡牘)이 모여드는데, 한번이라도 얻지 못하게 되면 책망이 따릅니다. 그래서 진장(鎭將)이 된 자는 사사로 취할 뿐 아니라 징색(徵索)하기에 괴로우나, 마지못해 온갖 방법으로 침탈하여 혹 염속(鹽粟)이나 우마(牛馬)·철물(鐵物)로 날마다 매매를 일삼되 뒤질까 염려하며, 서로 장사하도록 허가하여 그 세(稅)를 거두는 자까지 있습니다. 변방 백성의 힘을 다하여 국가가 금하는 물건을 날라다가 야인을 대어 주되 그칠 줄 모르니 어찌 통탄스럽지 않겠습니까?(함경북도 평사 유옥의 상소문 중)


 - 『중종실록 권29, 중종 12년 9월 22일 을미 -

  한편, 조선에서는 초피 교역에 따른 철의 유출로 여진인들의 무기가 철제화 되는 것에 많은 우려를 하고 있었다. 또한 여진으로의 우마(牛馬) 유출은 조선의 경제적·군사적 상황에도 불리하게 작용하였다. 연산군 때는 평안도와 함경도의 소를 모두 초피 사는데 써 버려서 백성들은 말을 가지고 밭을 가는 일도 있었고, 농우(農牛)가 이미 다 없어져 논을 갈 때 사람이 소가 하는 일을 대신한다고 할 정도였다.

  중종 때는 ‘과거에 북도에는 말 탄 군사가 1천여 명이나 되었는데, 지금은 겨우 40∼50명만 있을 뿐’이라며 변방의 방비를 우려하고 있었다. 당시 갑산부사(甲山府使) 황침(黃琛)은 ‘6진의 군졸이 말을 가진 사람은 적은데, 여진인들은 날로 번성하고 부유하며 모두 전마(戰馬)를 가졌다’고 지적하였다. 황침의 언급처럼 초피 교역으로 조선인의 경제 상황은 더 나빠지고 있었고, 반대로 우마·철물을 수입하던 여진인들은 경제적으로 발전하고 있었다.

  초피는 고대부터 활용되었지만, 15∼17세기에 조선과 명나라에서 유행한 초피라는 상품은 어쩌면 만주 지역 여진인들의 최고 히트 상품이었을지도 모른다. 조선과 명은 초피 수요의 거대한 시장이었으며, 그 공급은 만주 지역에서 담당해 왔다.

  조선의 백성들을 국가의 공납을 위해, 상인과 변장들은 사적 이익의 확대를 위해, 수령들은 자신의 출세를 위해 여진과의 초피 교역을 이용했다. 여진인들은 조선에 초피를 팔고, 대신에 우마와 철물 등을 받아왔는데, 이는 여진의 농업 발달과 생산력을 향상시켰고, 군사 무기를 발전시켰다.


  압록강 유역의 만포에서 이루어진 초피 무역은 건주위의 성장에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물론 건주위의 경우 조선과의 교역보다는 명과의 교역이 훨씬 절대적이었지만, 조선과 여진 사이에 진행된 초피 무역의 한 축은 분명 건주위와 인접한 만포라는 곳이었다.


  두만강 유역은 번호(藩胡)라고 불리는 여진인 부락이 가까이 있어 초피 무역이 더욱 활발했다. 5진에서는 초피 공납과 이에 따른 변장들의 수탈을 피해 조선인들이 여진인 마을로 도망하는 등 많은 폐해를 낳고 있었다.

  17세기가 되면, 만주의 여진인들은 부족의 통합을 거듭하여 마침내 누르하치가 후금(後金)을 성립시켰다. 이러한 정치·군사적 통합에는 오랫동안 서서히 이루어진 사회·경제적 발전이 바탕이 되었다. 그리고 후금의 등장은 만주 지역 동아시아 변동의 핵(核)이었다. 15∼17세기에 초피라는 만주 지역의 특산품이 여진의 사회·경제적 발달에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 물품의 이동과 상업화가 동아시아의 변동에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 이제 보다 깊은 관심을 가져야 할 필요가 있다.


 

[사진 4] 우암 송시열 초구 1령(서울특별시 시사편찬위원회, 『서울의 문화재』, 2011)

효종이 북벌 때 청나라의 혹독한 추위를 이겨내라고 이 옷을 하사하였다고 전해진다.

초구(갖옷) 1벌을 만들려면 초피 60장이 필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