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유라시아 물품 문명 문화사

세계 물품학의 최고 거점 연구단으로 거듭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칼럼

column

[연구진 섹션]

목활자 사용과 동아시아 인쇄술의 교류

  • 작성자HK+관리자

    작성일2022-05-25 16:23:12

    조회수1621

목활자 사용과 동아시아 인쇄술의 교류

 

HK+ 사업단 HK교수 권기석

사람들은 흔히 낱글자를 조합하여 인쇄하는 활자가 지면 전체를 통째로 새겨 넣는 목판보다 당연히 진일보한 인쇄 기술이며, 활자를 사용하면 당연히 다른 출판 방식에 비해서 더 많은 책을 효율적으로 찍어낼 수 있다고 생각하기 쉽다. 유럽에서 구텐베르크가 15세기에 발명한 금속활자 인쇄술은 실제로 그런 효과를 보여주었고 지식 매체의 폭발과 종교개혁 등 막대한 사회 변동을 불러오는 계기를 마련했다. 활자 인쇄기의 발명으로 훨씬 저렴하고 신속하면서도 정확한 내용의 책을 수많은 대중에게 전파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한국, 중국, 일본 등 동아시아에서는 구텐베르크보다 먼저 활자 인쇄가 시작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유럽만큼 활자가 지식 보급에 큰 효과를 보이지 못했으며, 기존의 목판 인쇄를 완전히 대체하지도 못하였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수 있겠지만, 표어문자(表語文字)인 한자의 특성상 수만 종에 달하는 활자가 필요했고, 자주 쓰는 글자는 여러 개 만들어야 하므로 대개 10~20만 자를 갖추어야 큰 불편 없이 원하는 책을 찍을 수 있었다. 그만큼 활자 한 세트를 갖추어놓기 위한 제작 원가가 비싼 편이었고, 국가 기관이거나 재력가가 아니면 쉽게 만들 수 없었다. 결과적으로 동아시아 활자 인쇄에는 어떤 강력한 진입장벽 같은 것이 존재하게 되었다. 

동아시아 인쇄 문화에서 활자는 간행 작업자가 선택할 수 있는 여러 선택지 중의 하나였을 뿐이다. 아예 ‘필사(筆寫)’라는 수작업을 통해 책 전체를 베낄 작정이 아니라면, 대개 목판과 활자라는 두 가지 방식 중에서 전략적 선택이 이루어졌다. 한번 새겨 두면 오래도록 많은 분량의 인쇄를 감당해 낼 수 있는 목판은 불경이나 사서삼경(四書三經)처럼 만세가 지나도 변치 않는 성인의 말씀을 후세에 전하는 목적으로 쓰였다. 언제든 종이와 먹만 가져오면 추가적인 판각 작업 없이 판각 당시와 동일한 내용의 책자를 얼마든지 생산할 수 있었던 것이다. 반면 조선왕조 실록(實錄)처럼 적은 부수만 인쇄할 뿐 아니라 나중에 또 찍을 계획이 없는 서적은 주로 활자로 인쇄했다. 활판은 이동 가능한(movable) 개별 활자를 밀랍 등을 녹이거나 나무조각을 끼워 임시로 고정해 둔 것이기에 많은 수량을 찍을 경우 글자가 뒤틀어지기 일쑤였고, 무엇보다 인쇄가 끝나면 판을 해체하므로 나중에 같은 책을 다시 찍으려면 조판 작업을 원점에서 다시 해야 했다. 
이렇듯 활자가 인쇄수단으로서 절대 우위를 차지하지 못하는 가운데, ‘금속’이라는 재료도 활자 사용이 제한되는 이유가 될 수 있었다. 광산에서 채굴된 원재료를 구해오는 것도 만만치 않았겠지만, 나무에 조각칼로 글자를 새겨 넣으면 완성되는 목판에 비해서, 금속활자는 글자를 새긴 뒤 거푸집을 만들고 용융된 금속을 부어 넣는 어려운 공정이 더 추가된다. 그래서인지 활자 인쇄의 진흥에는 대개 국가적 차원의 지원이 필요했는데, 조선초기인 15세기에 새 왕조에서 필요로 하는 각종 서적을 신속히 찍어내고자 왕명으로 주조된 계미자(癸未字), 갑인자(甲寅字) 등이 그 성과물이었다. 
중국과 일본은 일찍부터 국책사업으로 활자 제작이 활발히 이루어진 한국에 비해서, 활자 인쇄가 전체 출판문화에서 그다지 주류적 위치를 차지하지 못했다. 이들 나라들이 조선에 비해서 출판물의 양적 규모도 컸고 무엇보다 상업적 서적 유통이 활발했던 것으로 알려진 것을 감안하면 의외의 현상이다. 이는 상업적인 대량 인쇄에는 활자보다 목판 인쇄가 오히려 효과적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앞서 설명했듯이 활자는 초기 제작 원가가 많이 들고 대량 인쇄에 부적합할 뿐만 아니라, 재판을 찍을 때 공임이 중복해서 들어간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활자 인쇄는 인쇄문화의 대중화를 선도하기보다는 왕실과 국가에서 필요로 하는 서적을 신속하게 찍어내는 것이 주된 용도였다. 조선왕조에서 초기 활자는 국가와 왕실이 주된 사용자였고, 중국에서도 민간의 장서가(藏書家)들이 재판(再版)을 고려하지 않고 다양한 서적을 간행하고자 할 때 활자를 사용했다. 명대 강소성 무석(無錫)에 살던 화씨(華氏)와 안씨(安氏)가 홍치(弘治)~정덕(正德) 연간(1488~1521)에 만든 동활자(銅活字)가 그러한 사례이다. 
다만 활자의 재질로 ‘금속’만을 고집하지 않는다면 상황은 다소 달라질 여지가 있었다. 점토나 나무 같은 더 저렴한 재질로도 활자를 만들 수 있었던 것이다. 사실 기록상 중국에서 처음 출현한 것으로 알려진 활자는 금속이 아니라 진흙으로 만든 교니활자(膠泥活字)였다. 이 활자는 북송대(北宋代) 필승(畢昇)이 경력(慶曆) 연간(1041~1048)에 고안해 낸 것인데, 이는 흙을 구워 만드는 도활자(陶活字)로 계승되었지만 활자 재료의 주류가 되지는 못했다. 원대(元代)에는 왕정(王禎)이 1295년(元貞 1)에 안휘성(安徽省) 정덕현(旌德縣)의 지방관으로 재임하면서 목활자 6만 자를 최초로 만들었는데, 목판과 동일한 재질의 ‘나무’는 금속의 대체재로 후대에도 활자의 재료로 널리 활용될 수 있었다.


[사진 1]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소장 목활자
출처: 『책판(冊板), 조선의 문화를 새기다』(규장각 소장 책판 기획전 도록), 2017, 규장각한국학연구원

목활자는 금속활자보다 내구성이 다소 떨어지고, 수분을 흡수하면 변형될 수 있는 단점도 있다. 하지만 흙 소재의 활자보다는 견고하면서도 비교적 저렴하게 활자를 제작할 수 있다는 것이 큰 장점이었다. 이러한 특성으로 활자 인쇄를 민간에까지 널리 확산시키는 데 큰 기여를 하게 되었다. 한국에서 목활자는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금속활자본인 『직지심체요절(直指心體要節)』에도 일부 글자를 보충하는 용도로 사용된 바 있는데, 본격적으로 사용된 것은 조선후기 이후였다. 목활자는 임진왜란을 거치면서 소실된 많은 서적과 활자를 비교적 저렴한 비용으로 복구하는 데 매우 유용했고, 훈련도감, 내의원, 공신도감 등의 기관에서 주도적으로 목활자를 만들어 관영 인쇄에 활용했다. 전란 이후 국가 재정이 열악한 시기에 목활자의 경제성은 크게 주목을 받게 되었고, 인쇄 문화의 위기는 목활자가 널리 확산될 수 있는 계기가 된 셈이다. 

활자보다는 목판이 우세했던 중국에서도 목활자가 유용하게 활용된 간행물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혈연과 가계를 정리한 ‘족보(族譜)’였다. 족보는 가문 내부적으로만 소량 유통되어 대량 인쇄를 할 필요성이 별로 없으며, 새로운 세대의 구성원이 추가될 때마다 어차피 새로 조판해야 하므로 목판처럼 잘 보관해 놓았다가 다시 찍을 가능성을 고려하지 않아도 되는 간행물이었기 때문이다. 명대(明代) 말기부터 민간에서 족보 편찬이 성행하면서 목활자가 적극적으로 활용되었는데, 청대(淸代)에 이르면 출판된 족보의 60%가 목활자로 인쇄되었다고 한다. 족보 간행을 위해 활자 등의 공구를 휴대한 인쇄업자인 ‘보장(譜匠)’이 여러 가문을 찾아다니면서 성업 중이었다. 
조선에서도 중국과 마찬가지로 족보를 만드는 데 목활자가 자주 사용되었다. 15~17세기의 초기 족보는 대개 목판으로 간행하는 경우가 많았으나, 18~19세기에는 점차 활자본 족보가 대세가 되어갔다. 활자를 가지고 다니면서 족보를 전문적으로 위조해 주는 인쇄업자가 18세기부터 출현하여 사회문제가 될 정도였다. 19세기 이후로는 조상이나 선현의 글을 오래 전하고자 목판을 선호하던 문집 간행에서도 점차 목활자가 주로 사용되는 추세가 나타났고, 근대적인 연활자(鉛活字) 인쇄기가 보급된 19세기말부터 일제시기인 1920~30년대까지도 적지 않은 전통 서적이 목활자로 출간되었다. 

중국에서 활자가 국가적 간행 사업을 위해 활용된 것은, 청대에 들어선 18세기에 이르러서였다. 15세기에 이미 국가 주도로 금속활자를 만든 조선에 비해서 한참 늦은 것이었다. 강희(康熙)~옹정(雍正) 연간(1654~1735)인 1725년에 거질의 백과전서인 『고금도서집성(古今圖書集成)』을 동활자로 찍어낸 데 이어서, 건륭(乾隆) 연간(1736~1796)에는 국가적 간행사업에 활용하기 위한 목활자를 황제의 명으로 제작하여 취진판(聚珍板)이라고 명명하였다. 이 목활자로 134종 2,389권의 저술을 간행하여 『무영전취진판총서(武英殿聚珍板叢書)』라 했고, 『무영전취진판정식(武英殿聚珍板程式)』이라는 활자 인쇄법을 그림으로 설명한 책도 펴냈다. 이후 각지의 관아와 민간에서 취진판 서적을 모방하게 되면서, 지방과 민간에서 목활자 인쇄가 활성화되는 효과도 있었다. 


[사진 2] 흠정무영전취진판정식(欽定武英殿聚珍版程式)』 표지와 삽입 그림 ‘파서도(擺書圖)’
출처: 『무영전취진판정식』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소장본 (청구기호: C3-276)

그런데 『고금도서집성』을 찍기 위해 애써 구리로 활자를 만들어 놓고도, 바로 다음 세대에 나무 활자인 취진판을 다시 만든 데에는 재미있는 사연이 있다. 『고금도서집성』을 인쇄한 후 동활자를 무영전(武英殿)에 보관해 두었는데 자꾸 도둑맞아 없어지면서 점차 수가 줄어들게 되었다고 한다. 이에 자신의 과실로 돌아갈 것을 두려워 한 관리 담당자는 건륭 초기 연경(燕京)에 돈이 귀해지자 동활자를 전부 녹여 동전을 주조하자고 주청하였고, 이게 받아들여지면서 남아있는 활자도 모두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명대에도 구리 생산이 줄어들거나 동전을 주조할 필요성이 높아지면, 동활자가 줄어들고 목활자가 대신 나타나는 현상이 있었는데, 활자 대신 돈을 만들면 더 득을 보겠다는 유혹 때문에 중국에서 금속활자 제작이나 관리가 부실했는지도 모르겠다. 반면에 곡물이나 면포 같은 현물화폐가 주로 쓰이다가 숙종대 상평통보(常平通寶) 이후에야 동전 유통이 일반화된 조선에서 금속활자가 잘 보존되면서 오래도록 사용된 이유는 어쩌면 금속화폐의 유통이 부진했던 것과 어떤 관련이 있지 않을까?

조선후기 중국의 인서체(印書體)가 도입되는 데에도 목활자가 중요한 매개 역할을 했다. 인서체란 필서체(筆書體)와 상대되는 말로서, 말 그대로 인쇄용 서체(font)를 의미하는데, 송대에 판각공들이 새기는 작업의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서 송조체(宋朝體)가 생겨났고, 이것이 명대에도 계승되어 명조체(明朝體)가 되었다. 이러한 인쇄용 글자체는 가로는 가늘고 세로는 굵은[橫輕直重] 필획이 특징인데, 판각 시간과 노력이 절약되고 필서체에 비해 가독성이 높다는 장점이 있었다. 17~18세기 조선에서도 이미 중국의 인서체를 본뜬 목활자가 관청과 민간에서 만들어진 바 있는데, 교서관인서체자(校書館印書體字), 율곡전서자(栗谷全書字) 등이 있었다.
강희제의 명으로 편찬한 유명한 한자 사전 『강희자전(康熙字典)』의 글자체와 건륭제가 만든 목활자 무영전 취진판도 인서체였다. 18세기 후반 조선의 국왕 정조(正祖)는 목활자인 생생자(生生字, 1792)와 생생자의 금속 버전인 정리자(整理字, 1796)를 제작하면서, 바로 그 취진판의 인서체를 본받았다. 정조는 새로운 서체의 활자를 만들기에 앞서 청으로부터 목활자를 수입하였는데, 1790년과 1791년 두 해에 걸쳐 들어온 총 42,450자의 ‘연무목자(燕貿木字)’가 그것이다. 이 중국산 목활자는 강희제와 건륭제의 이름자인 ‘玄’과 ‘弘’의 필획 일부를 지우는 식으로 피휘(避諱)한 것을 확인할 수 있고, 조선시대 목활자본 서적에서는 전혀 사용된 예를 찾을 수 없다. 조선에서 실제 사용하려는 목적이 아니라, 순수한 시험용으로 구입했음을 알 수 있다. 『홍재전서(弘齋全書)』에서 정조는 취진판을 참고하여 만든 두 활자를 다음과 같이 평가하였다. 

“생생자와 정리자는 고르고 반듯하며 새겨 주조한 것이 정교하여 위부인자(衛夫人字: 갑인자 계열 활자), 한구자(韓構字) 등과 비교하면 젖은 종이를 고르게 붙여야 한다든가 글자가 비뚤거나 흔들리게 인쇄될 근심이 없다. 인쇄가 간편하고 빠르며 비용과 수고를 줄일 수 있어서 중국 취진판식보다 도리어 낫다. 다만 그 글자체가 너무 모나서 원후(圓厚)한 뜻을 자못 잃은 점이 흠이 될 뿐이다”
글자체가 너무 모난 것은 인서체 활자의 전형적인 특징이다. 정조는 서체가 다소 마음에 들지 않은 것을 제외하고는 이전의 조선 활자는 물론이고 모델이 된 중국 취진판보다 낫다고 자평하였다. 서체뿐만 아니라 활자의 규격이 표준화되어 한결 편리하고 정확한 인쇄가 가능해진 성과도 있었다. 이렇듯 활자 인쇄술은 동아시아 세계 내부의 상호 교류를 통해서 더욱 발전하였던 것이다.


[사진 3] 중국의 취진판 서체(左)와 이를 모델로 한 조선의 생생자 서체(右)
출처: 『武英殿聚珍板程式』(左, 장서각 소장본), 『御定人瑞錄』(右, 규장각 소장본, 청구기호: 奎 4183)

목활자 인쇄는 한자(漢字)를 대상으로만 시도되었던 것은 아니었다. 조선에서 한글 활자를 만들어 언해본(諺解本)이나 윤음(綸音) 등을 인쇄했듯이, 한자가 아닌 위구르문(回鶻文)을 새긴 목활자 실물이 중국 감숙성(甘肅省)에 소재한 돈황(敦煌) 막고굴(莫古窟)에서 발견된 바 있다. 이 활자는 12세기말~13세기초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데,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활자 실물이라고 한다. 위구르문 활자는 교착어(膠着語)라는 위구르어의 특성을 반영하여, 한자처럼 낱글자 하나가 곧 한 단어가 되는 정방형 활자가 아니라, 자모 및 음절 단위에 따라 다양한 형태를 가진 활자였다. 비슷한 시기에 서하(西夏) 문자로 작성된 활자본 불경이 감숙성영하회족자치구(寧夏回族自治區) 일대에서 출토되어 현존하고 있다. 니활자본(泥活字本)인 『유마힐소설경(維摩詰所說經)』은 13세기, 목활자본인 『길상편지구화본속(吉祥遍至口和本續)』은 12세기 후반에 인쇄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 책들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활자인쇄본의 실물이라고 한다.


[사진 4] 돈황에서 발굴된 위구르문자 목활자

출처: 彭金章, 「有关回鹘文木活字的几个问题」 『敦煌硏究』 2014 (3)

현재의 중국 영토에서 발견된,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목활자와 목활자본이 공교롭게도 모두 한족(漢族)이 아닌 주변 민족의 문자라는 점이 특이하다. 그렇다면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한문’ 목활자는 어디에 있을까? 앞서 정조가 사들였다는 ‘연무목자’가 현재도 대한민국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데, 2016년 활자 테마전 도록에 따르면 13세기 위구르문 활자를 제외하고는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중국 목활자라고 한다. 200여 년 전, 더 나은 인쇄기술을 도입하려는 정조의 노력으로 인해 뜻밖에도 중국의 소중한 인쇄문화 유산이 오늘날까지 보존될 수 있게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