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朝鮮初期 貢納制 운영과 貢案改定

  • 저자소순규 저

    출판고려대학교 대학원 한국사학과 박사학위논문

  • 작성자HK+관리자

    작성일2021-03-09 15:13:08

    조회수1415

논문소개

본 논문은 조선초 공납제의 구조 및 운영양상, 그리고 그 변화과정을 貢案 개정을 통해 분석한 것이다. 오늘날까지 공납제에 관한 연구는 주로 제도 자체에 대한 분석에 치우쳐 있었고, 또 조선전기 기간 동안 공납제 운영의 양상을 동일한 것으로 간주하여 고찰해 왔다. 아울러 조선후기 대동법으로 귀결되는 역사적 흐름을 염두에 두고 공물의 대납·방납의 성행에 관한 연구가 활발하게 이루어져 왔다.
그런데 이러한 연구들에서는 조선 건국 이후의 공납제가 부세제도로서 운영된 이유가 무엇인지 선명하게 드러나지 않는다는 문제를 내포하고 있다. 기존 연구에서도 충분히 지적하고 있듯이, 현물을 民으로부터 직접 수취하는 형태는 ‘공평하고 합리적인’ 부세제도를 운영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조선 건국 당시 지배층도 이러한 문제점을 인식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공납은 왕조 교체 이후 정식세제로 채택되었으며, 조선전기 200년간 줄곧 유지되었다. 요컨대 공납제의 존속, 유지, 발전은 당시 조선왕조가 위치하고 있던 역사적 조건에 대응한 국가의 필요에 의한 것이었다.
본 연구는 조선 건국 이후 16세기에 이르는 기간 동안 공납제의 제도적 변화 양상을 공안 개정을 통해 살펴보고자 하였다. 고려시대의 공납제는 조선 건국 이후 어떻게 제도적으로 변화하였는지를 살피고, 각 시기별 공납제 구조의 변화 동인이 무엇인지를 추적하였다. 이 과정에서 변화의 원인이 비단 공납제 자체의 문제 뿐 아니라 국가의 전반적인 재정 정책의 방향성과 관련을 맺고 있었으며, 궁극적으로 조선시대 공납제가 자체적 모순에도 불구하고 대동법 시행 이전까지 유지될 수 있었던 배경 역시 당대의 생산, 유통 조건 하에서 확립된 재정 구조와 긴밀한 관련이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조선 건국 이전 고려시대의 공납제는 12세기 이후 역사적 변화에 따라 확장되었다. 고려전기 전시과 체제의 붕괴와 농장의 범람, 사전의 확대 등은 농민의 유망을 초래하였고, 이는 국가의 수취제도 운영에 심각한 차질을 초래하였다. 더하여 몽고와의 항쟁과 강화를 비롯한 대외정세의 변화 등도 국가의 재정 운영에 큰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이에 따라 고려전기에는 존재하지 않던 상요·잡공의 현물세가 신설되었고, 정역호로서 특정 공물을 납입하는 貢戶 계층이 탄생되었다. 아울러 고려 말 기사양전의 과정에서 田稅貢物이 신설되면서 공납제는 한층 복잡한 운영형태를 가지게 되었다. 1392년 조선을 건국한 이성계는 이러한 고려 공납제를 그대로 계승하였고, 이를 바탕으로 조선 최초의 공안인 壬申貢案을 상정하기에 이르렀다.
건국 후 약 10년 만에 국왕으로 즉위한 태종은 집권 이후 강력한 재정 개혁을 구상하였다. 강력한 왕권 구축 및 국가 안보를 위해 米穀과 軍役 자원의 확보가 절실한 시점이었고, 이에 따라 미곡 및 군역에 대한 강력한 수취구조가 정착되기에 이르렀다. 그런데 이러한 수세구조는 정역호 공물과 전세공물의 수취에 심대한 차질을 가져왔다. 이에 따라 과거의 공납제는 군현 단위에 분정되는 각관공물을 중심으로 재편되었고, 수취량 역시 과거에 비하여 확대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태종대 정책은 집권 말년 추진한 공안 개정에 반영되었는데, 당시 공안은 다음 국왕인 세종대 완성되었다.
세종공안은 태종~세종대 초반 추진된 재정개혁이 반영된 결과물이었다. 세종공안에 규정된 공납제의 운영 형태는 과거에 몇 가지 점에서 상당한 차이가 발생하였다. 우선 행정단위인 道-郡縣 뿐 아니라 營·鎭·浦 단위로 공물이 분정되었는데, 이는 각관공물로 인하여 증가된 민호의 부담을 경감시키기 위하여 태종대부터 시행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한편 공물 분정에서는 道 단위가 우선적으로 고려되고 道 단위 공물이 다시 郡縣 단위로 분정되는 형태로 이루어졌다. 한편 국가의 재정 운영에서도 道 단위 공액이 중요한 의미를 가지게 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道 단위 공물 분정 및 공액 운영에서 관찰사의 역할이 강조되었다. 그리고 세종공안에서 공물로 분정된 물종은 대략 300종 이상이었으며, 물종별 공액의 규모는 대체적으로 각 관서별로 관례적 지출량의 두 배 수준에서 정해졌던 것으로 생각된다.
세종공안은 약 50년간 기능하면서 공납제 운영의 전형성을 구축한 것이었다. 그런데 세조 집권 이후 공안은 다시금 대대적으로 개정되기에 이르렀는데, 당시 공안 개정의 動因은 대납의 법적 공인과 橫看의 작성이었다. 대납은 세종대부터 부분적으로 허용되던 것이었는데 세조는 이 대납을 전면 허용함으로서 공납제의 근본적 모순점인 不産貢物을 해소하고자 하였다. 아울러 횡간을 작성하여 국가의 지출규식을 확보함으로서 항구적인 재정구조를 확립하고자 하였다. 이러한 조건에 짝하여 만들어진 을유공안은 과거보다 상당히 감축된 공액을 규정하였다. 한편으로 을유공안부터 전세 및 노비신공이 수록됨으로서 貢案은 명실상부한 국가의 예산 장부로 위상이 강화될 수 있었다.
그런데 세조 사후 대납이 금지되고 本色納 체제로 회귀하였다. 대납을 전제로 만들어진 을유공안은 군현마다 상당량의 불산공물을 포함하고 있었으며, 이에 따라 성종 집권 직후부터 공안 개정의 논의가 제기되었다. 성종 원년부터 4년에 이르기까지 개정된 성종공안은 본색납에 근거한 공납제 운영을 규정하였고, 아울러 수취량 역시 을유공안에 비하여 대대적으로 감축하였다. 그런데 이러한 무리한 공액 감축은 곧 국정운영에 심각한 차질을 초래하였고, 이에 따라 공액의 현실화 문제가 성종 집권 기간 동안 꾸준히 제기되었다. 이에 따라 성종 사후 집권한 연산군 7년 다시금 공안 개정이 이루어지게 되었고, 그 결과 만들어진 것이 연산군 신유공안이었다. 신유공안은 조선전기 마지막 공안으로서 16세기 전 기간에 걸쳐 준용된 공안이었다.
태조대 임신공안에서 연산군대 신유공안에 이르기까지 공안 개정 과정에서 나타난 공납제 운영 및 국가 재정구조의 변화 크게 다섯 가지 정도로 정리할 수 있다.
첫째, 국초부터 貢物은 국가 재정 운영의 가장 근본적인 역할을 담당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고려시대 재정 구조의 유산과 이를 개혁하기 어려운 시대적 조건 등으로 말미암아 건국 당시부터 공납제는 재정 운영의 중요한 축을 담당하게 되었고, 이것은 이후 대동법으로 공물제도가 대대적으로 개혁될 때까지 유지되었던 것이다.
둘째, 조선시대 공납제는 戶稅의 일환으로, 道 · 郡縣을 매개로 하여 부과되고 수취된 세제로 변모하였다는 것이다. 이러한 변화는 과거에 비하여 공물 부담 계층을 확대하여 부담을 경감시키면서도 국가 차원에서는 수취량을 증가시키기 위한 방법이었다고 판단된다.
세 번째로는 조선시대 공납제는 지방제도와 긴밀하게 연동되는 형태로 점차 변화하였다. 건국 이후 공안의 개정과정에서 점차 공물 분정에서 도의 규정성이 강화되었고, 공물 납부 및 여타 수세제도의 납부 단위로서의 군현의 중요성 역시 한층 강화되었다.
네 번째로는 공물의 수취량 및 貢案의 공액은 지출과 연동되는 형태로 변화하였다. 세종대 일 년 경비의 두 배에 달하는 수취량은 성종, 연산군대 공안 개정에서는 예비 수취가 거의 이루어지지 않는 체제로 변모하였는데, 이는 橫看이란 지출 규식의 성립과 관련이 있는 것이었다.
마지막으로는 공안의 성격 자체의 변화이다. 건국 초기 공물의 수취장부였던 공안은 세종대 이르러 도-군현 뿐 아니라 영·진·포의 군사제도에도 확대되어 적용되었고, 아울러 일부 진상물이 수록되면서 그 성격이 변화하기 시작하였다. 세조대에 이르러 전세, 노비신공 등 국가 주요 수입들이 모두 공안에 기재되어 운영되기 시작하면서, 공안은 『經國大典』에서 규정된 국가 예산의 주요 장부로서의 위상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