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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논문] 조선후기 보청(譜廳)의 설치와 기능 - 평강채씨(平康蔡氏) 사례를 중심으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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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일2024-04-12 13:27: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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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후기 보청(譜廳)의 설치와 기능 - 평강채씨(平康蔡氏) 사례를 중심으로 -


◎ 저자명: 권기석(HK교수)

◎ 학술지: 韓國史硏究 제203집

◎ 발행처: 한국사연구회

◎ 간행일: 2023.11.28


조선후기 여러 문중들은 족보를 편찬하기 위한 임시 기구인 ‘보청(譜廳)’을 설치하였다. 보청에는 편찬 사업을 추진할 임원들이 소속되어 있었고, 보청을 기반으로 하여 문중 구성원의 집단적인 협력이 활발히 이루어졌다. 평강채씨는 17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전반까지 모두 6번에 걸쳐 족보를 편찬했다. 최초의 족보인 신축보는 보청과 같은 족보 편찬 조직이 갖추어지지 않은 상황에서 선구적인 개인의 노력으로 편찬될 수 있었다. 그 결과 초기의 족보는 계보의 누락이 많았고 간행을 완수하는 데에도 큰 어려움이 있었다.

18세기 중반의 두 번째 족보인 무진보(戊辰譜)부터 보청의 설치가 확인된다. 보청의 위치를 살펴보면, 두 번째 족보에서는 전라도 흥덕(興德)의 사찰이었고, 세 번째 족보인 임자보(壬子譜)와 네 번째 족보인 을해보(乙亥譜)에서는 중앙의 유력한 관료들이 수보를 주도했기 때문인지 서울에 보청이 설치되었다. 다섯 번째 족보 무술보(戊戌譜)와 여섯 번째 족보 신유보(辛酉譜) 때는 조상의 유적지가 있는 전라도 임피(臨陂)로 보청이 이동하였다. 보청의 위치는 서울과 지방 사이를 오갔지만, 경기, 충청, 전라 지역에 거주하는 문중 구성원들이 널리 참여하였다.

보청은 전국적인 범위에 인적 네트워크를 형성하기 위해 전국 각처의 족인들에게 지속적으로 연락을 시도하였고, 계파별 혹은 지역별로 전담 유사(有司)를 선임하여 족보 참여에 필요한 단자(單子)를 수합하고 간행 비용을 모금하였다. 또한 보청은 족보 편집 원칙을 제정하고 간행 작업을 전반적으로 총괄했으며, 족보 인쇄에 적합하면서도 저렴한 목활자(木活字) 인쇄술을 채택하고 완성된 족보를 필요한 곳에 배포하는 노력을 기울이기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