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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논문] 최소영, 몽골제국 시기 티베트의 역참 운용 연구

  • 작성자HK+관리자

    작성일2023-01-05 15:34: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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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제국 시기 티베트의 역참 운용 연구


◎ 저자명: 최소영(HK연구교수)

◎ 학술지: 동양사학연구 제160집

◎ 발행처: 동양사학회

◎ 간행일: 2022.12.31


중앙티베트인들은 몽골의 침입을 받고 공포에 사로잡혔다. 몽골은 첫 침입에서 승려 500명을 살해하고 대표를 소환했다. 평균 고도 4천 미터 이상의 고원에 사는 티베트인들로서는 처음 받는 外侵이었다. 그러나 곧 사정은 바뀌어, 몽골 지배층은 여러 다양한 종교 중에 티베트 불교를 자신들의 종교로 받아들이고 티베트 승려들을 스승으로 받들었다. 사꺄파를 비롯한 여러 교파의 승려를 초대하는 사절단이 쉬지 않고 티베트로 밀려오고, 승려들은 여러 무리를 이끌고 카라코룸, 이후 대도로 가서 그들을 위해 설법하고 기도하였으며 그에 대한 감사의 표시로 대단한 양의 보시를 받아 몽골 수도를 떠났다. 7~9세기 토번 제국 시기 불교를 배우기 위해 인도와 네팔, 카쉬미르 등지에서 많은 금을 주고 “스승님”을 모셔 와야 했던 티베트 불교는 이제 세계제국 군주와 그 가문의 스승이 되어 금과 은, 비단 등을 손에 넣었다. 그런데 몽골인들의 네트워크인 역참을 이용해 승려들을 이동시키고 이 물품들을 티베트로 가져오는 길은 험난했고, 한인들은 티베트 승려와 보시 물자 이송 때문에 站戶들이 도망가고 역전 체제가 무너진다고 한탄했다.

그런데 이 문제는 티베트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몽골은 티베트에도 역참을 세워 몽골 조정과 연결시켰고, 만호 단위로 각 참을 관리하게 했다. 인구가 많고 마을과 도시가 조밀한 漢地에 비해 티베트는 인구는 적고 땅은 넓었기 때문에 티베트 만호 대부분의 소속 민호가 站戶가 되어 역참을 유지하는 데에 동원되었다. 그리하여 각 대참에 배정된 참호의 수는 대략 3,000 호로 맞춰졌고 전체 호수 중 티베트 참호의 비율은 다른 지역에 비해 대단히 높았다. 티베트 역참 문제에 대해 카안 울루스의 관리들이 “지금 위짱 등은 소참(小站) 7곳은 물론 大站 28곳도 서번(西蕃)의 보시를 운송하고 파견되는 사신을 운송하는 것이 실로 잦으며 人戶 수는 적고 역 간 거리는 아무리 가까워도 3백리, 5백리 이상입니다.”라고 보고한 것은 정확한 것이었다. 특히 보시를 운송하는 것이 역참 유지에 가장 큰 문제였고 그 때문에 티베트 역참 기록에는 반드시 짐 싣는 말이나 가축이 언급되었다.

티베트의 역참은 참호가 상주하며 말과 음식 등 물품을 제공해야 하는 대참과 티베트 내부에서 이동하는 관료와 승려들에게 그때그때 음식을 제공해야 하는 소참으로 구성되었으며 우리는 대참은 물론 소참 유지의 부담 역시 적지 않았음을 보았다. 각 만호들의 역참 관리는 만호장이 책임을 졌고 티베트 전체에 대하여는 사꺄파의 세속 수령인 뾘첸이 책임을 졌다. 站戶들이 궁핍하여 역참이 유지가 되지 않으면 사꺄파는 직접 구제해 가며 역참 유지에 힘을 썼다. 몽골 조정 역시 반란 문제가 아닌 이상 티베트 내부의 문제에는 큰 관심이 없었으나 티베트와 몽골 수도 간의 역참은 끊이지 않도록 노력했다. 역참에 대한 물자 공급과 노역은 티베트인들에게 어떤 의무보다 무거운 부담이었고 새로 티베트의 패자가 된 쟝춥 걜챈은 역참에 사신들 먹을 보릿가루 실어 나르느라 站戶들의 허리가 부러질 정도라고 한탄했지만, 그도 역시 티베트 내란 종식 후의 혼란 속에서도 역참은 그대로 유지시키겠노라고 몽골 조정에 선언했던 것이다. 14세기 중반 몽골의 초청을 받은 4대 까르마빠 뢸빼 도르제(rol pa'i rdo rje, 1340 1383)가 샤포 참에서 출발하면서 역참 이용을 거부하고 자신을 초대하러 온 이들에게도 역마를 타지 말 것을 청한 일화는 바로 이러한 배경에서 나온 것이다. 뢸빼 도르제의 말에 站戶들은 모두 기뻐하면서 가축들을 몰고 집으로 돌아갔다. 요약하면, 몽골제국 시기 티베트에서는 민호들이나 세속 우두머리 모두 몽골 조정과 연결하는 길이 끊이지 않고 유지되게 하는 것이 가장 무겁고도 중요한 임무였고 이는 “라마의 거주지이며 부처님의 가르침이 펼쳐진 곳”인 티베트의 특징이었다고 할 수 있다.

티베트 사료와 한문 사료들에서 최대한 역참 관련 기록을 찾아 살피고 분석해 본 이 연구가 몽골제국 내 티베트의 위상과 당시 티베트인들의 생활의 일면을 볼 수 있는 작은 디딤돌이 되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