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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논문] 한성주, 조선 전기 초피 생산과 유통

  • 작성자HK+관리자

    작성일2023-01-05 15:19: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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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전기 초피 생산과 유통


◎ 저자명: 한성주(일반연구원)

◎ 학술지: 전북사학 제66호

◎ 발행처: 전북사학회

◎ 간행일: 2022.11.30


본고는 조선 전기 초피 생산지를 검토해 보고, 초피 유통에 대해 시론적인 분석을 하였다. 이를 통해 첫째, 초피는 강원도와 평안도에 궐공으로 지정되었고, 둘째, 강원도의 경우 토공으로 지정된 지역이 있으나, 실제 초피 공납의 토산 지역이 확인되었으며, 1425년(세종 7)에는 매년 700령의 초피 상납이 정해졌다. 넷째, 함경도의 경우 처음에는 궐공이 없었으나, 총 13개 지역의 토산으로 지정되었으며, 1425년(세종 7)에 매년 1,565령의 초피 상납이 정해졌다. 특히 두만강 유역의 5진 지역 역시 초피 공물이 지정되었다. 따라서 조선 전기 평안도와 함경도는 주요 초피 산지였으며, 그중에서도 함경도가 초피의 최대 생산지였다.

15세기 초에는 함경도 갑산과 평안도 여연에서 생산되는 초피가 왕실로 진상되었고, 두 도의 초피가 속아문의 포화와 교환되었으며, 이 초피는 다시 명 사신들이 가져온 명의 포화와 교환되었다. 또 북방에서 생산된 초피는 여러 다양한 사적 경로를 통해 서울의 시장에서 무역되었다. 이렇게 서울에 모인 초피는 다시 지방의 하등품 초피와 교환되거나, 다른 현물 또는 면포 등과 교환되어 지방의 공물로 납부되었다.

성종대 이후 서울에 모인 초피는 부상대고와 연결된 방납자의 초피였다. 그런데 점차 조선에서 생산되는 초피가 질이 좋지 않게 되자, 방납자의 초피 대부분은 여진인들과의 무역에서 얻었다. 여진인들과 초피 무역을 주도한 것은 商賈들이었으며, 이들은 서울에서 가지고 간 면포를 변방의 우마와 철물 등과 교환한 뒤, 다시 여진인들과 초피 무역을 통해 이익을 도모하였다. 그리고 여진인들의 상경으로만 매년 720~960장의 초피가 왕실에 진상되었다. 여진인들이 진상한 초피에 대해 조선에서는 回賜라는 형식으로 그 값을 지불해주었는데, 외거노비의 貢布가 사섬시에 바쳐졌고, 그 포가 야인에게 答賜되었으며, 상고들이 다시 綿紬와 綿布로 여진인들이 받은 포와 바꾸었다.

조선 전기 초피는 국내와 만주 지역에서 생산되어 다양한 유통체계를 거쳐 활발하게 거래되었다. 즉 공물로 지정된 초피는 공적인 체계 안에서 왕실과 국가에 납부되었고, 민간의 수요를 충족하기 위해 사적인 체계 안에서 다른 상품들과 교역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