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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논문] 이승호, 衛滿朝鮮 시기 濊族 사회의 동향과 滄海郡路 -‘滄海郡 在沃沮說’에 대한 최근 비판의 반론을 겸하여-
작성자관리자
작성일2021-12-01 17:26: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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衛滿朝鮮 시기 濊族 사회의 동향과 滄海郡路 -‘滄海郡 在沃沮說’에 대한 최근 비판의 반론을 겸하여-
◎ 저자명: 이승호(HK연구교수)
◎ 학술지: 단군학연구 제45호
◎ 발행처: 고조선단군학회
◎ 간행일: 2021.08.30
본 논문은 기원전 128년에 전개된 薉君 南閭 집단의 “畔右渠” 움직임과 漢의 滄海郡 설치 기도를 주목하고, 이를 실마리 삼아 기원전 2세기 무렵 위만조선 주변 濊族 사회의 동향을 검토한 것이다.
衛滿朝鮮 성립 이전 고조선 동쪽 嶺西와 嶺東 지역에 걸쳐 넓게 퍼져 있던 예족 사회는 臨屯과 그 동북쪽의 沃沮(夫租) 지역을 중심으로 발전하였다. 그러나 기원전 2세기 초에 위만조선이 성립하자 임둔과 옥저 사회는 곧 위만조선에 복속되고 만다. 이후 2세기 후반 右渠 시대에 이르러 위만조선은 주변 지역에 대한 통제력을 더욱 강화해 나갔는데, 이것은 결국 예군 남려를 중심으로 한 예족 사회의 저항을 불러왔다. 예군 남려를 중심으로 결집하기 시작한 예족 사회는 임둔과 옥저, 그리고 압록강 중류 유역의 句麗 집단 등으로 이루어져 있었으며, 기원전 128년 이들은 위만조선의 지배로부터 이탈하여 요동군과 접촉하였다. 이에 漢은 이들을 대상으로 창해군 설치를 기획하였다.
예군 남려 집단을 대상으로 설치된 창해군의 중심지는 함경남도 동해안 지역, 즉 옥저(부조) 지역에 위치하였다고 이해된다. 기원전 1세기 전반기의 자료인 「夫租薉君」 銀印의 존재는 당시 옥저 사회 ‘薉君’의 존재를 보여주는 실물 자료라 할 수 있다. 예군 남려의 정치적 거점이었던 옥저 지역은 위만조선의 영향력에서 일정정도 벗어나 자체적인 세력 규합을 꾀함에 있어 유리한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다만, 옥저 사회가 위만조선의 지배에서 벗어나 자립하기 위해서는 외부와 소통할 수 있는 새로운 경로가 모색되어야만 했는데, 창해군의 설치 과정은 바로 이러한 새로운 교통로의 개척 과정에 다름 아니었다. 곧 창해군 설치는 압록강 유역으로부터 함흥으로 이어지는 교통로를 개척해 나가며 진행되었다. 그러나 교통로 상에 겹겹이 펼쳐져 있는 산악 지형을 극복하지 못하고 漢의 창해군은 3년 만에 폐지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