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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논문] 청말민초(淸末民初) 광동성 빈랑(檳榔) 섭취 문화의 쇠퇴
작성자관리자
작성일2024-04-12 13:23: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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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말민초(淸末民初) 광동성 빈랑(檳榔) 섭취 문화의 쇠퇴
◎ 저자명: 김현선(HK연구교수)
◎ 학술지: 東方學 제50집
◎ 발행처: 한서대학교 동양고전연구소
◎ 간행일: 2024.2.28
본 연구는 청말민초(淸末民初) 광동성(廣東省)에서 빈랑(檳榔) 섭취 문화가 쇠퇴하는 과정을 살펴보고, 그 원인을 고찰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한대(漢代) 빈랑이 중국에 유입된 후 광동성에서는 빈랑을 섭취하는 문화가 형성되었다. 당송시대 빈랑 섭취는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대중화되었으며, 명대 이르러 이러한 문화는 더욱 성행했다. 광동성에서 빈랑은 특별한 의미가 있었으며, 손님을 대접하거나 관혼상제와 같은 의식에서 중요한 식품으로 이용되었다. 광동성에서 빈랑 섭취 문화가 형성되는데, 빈랑의 장기(瘴氣) 제거라는 약리적 효능이 큰 영향을 미쳤으며, 이러한 경향은 청대까지 이어졌다. 그러나 청말에 이르러 불과 몇십 년 만에 빈랑 섭취 문화는 광동성에서 사라지기 시작했다.
이러한 급격한 변화는 무역 구조와 빈랑에 대한 인식변화에서 비롯되었다. 청말 아편 무역으로 인한 은귀전천(銀貴錢賤) 현상은 빈랑 유통에도 타격을 주었고, 이에 따라 빈랑 공급은 감소하고 가격은 높아졌다. 더하여, 아편전쟁 직후 광동성은 사회 경제적으로 큰 어려움에 직면했으며, 빈곤에 빠진 사람들은 예전처럼 쉽게 빈랑을 구매해 씹을 수 없게 되었다. 다음으로 광동성 사람들은 대외무역과 아편전쟁을 겪으면서 사회적으로 변화가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았고, 빈랑에 대한 인식도 근본적으로 바뀌었다. 당시 빈랑의 장기 제거 효과는 더 이상 강조되지 않았으며, 빈랑을 씹는 것은 오히려 낡은 관습으로 여겨졌다. 이러한 사회적 변화 속에서 궐련이 대량으로 유입되어 세련된 이미지와 다양한 가격대로 소비자를 유혹했다. 그 결과 궐련이 빈랑을 대신하여 대중화되었으며, 광동성에서 빈랑 섭취 문화는 사라지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