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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논문] 이승호, 夫餘 官制의 구조와 특성: 고구려 초기 官制와 비교ㆍ검토를 겸하여
작성자HK+관리자
작성일2022-04-13 12:37: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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夫餘 官制의 구조와 특성: 고구려 초기 官制와 비교ㆍ검토를 겸하여
◎ 저자명: 이승호(HK연구교수)
◎ 학술지: 고구려발해연구 제72집
◎ 발행처: 고구려발해학회
◎ 간행일: 2022.03.30
본 논문은 『三國志』 東夷傳 夫餘條와 高句麗條 기록을 바탕으로 3세기 무렵 부여와 고구려 官制를 비교ㆍ검토함으로써 양국의 정치구조 특징과 상호간 차이점을 검토한 것이다. 그리고 이를 통해 3세기 이후 두 나라의 국가체제가 서로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는 과정을 살펴보고자 하였다. 본문에서 논의한 내용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먼저 기록에는 전하지 않지만, 고구려의 사례에 비추어 볼 때 부여의 ‘諸加’ 세력 또한 ‘使者’ 등의 屬官을 설치하였을 가능성이 크다. 다만 고구려 大加의 경우 屬官의 명단을 왕에게 보고해야 했었던 반면, 부여의 경우는 그렇지는 않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특히 고구려에서 大加의 屬官이 使者ㆍ皁衣ㆍ先人으로 명시되어 있었던 것은 각 大加가 자치한 官에 대해 고구려 왕권이 그들을 官等制 안으로 편입시킴으로써 중앙의 통제력 아래에 두고자 했음을 보여주는 조치로 이해된다. 반대로 부여의 경우는 고구려의 경우처럼 大加가 자치하였던 속관 조직이 하나의 체계로 통일되어 있거나 하지는 않았으며, 이것은 屬官 조직을 바탕으로 하는 大加의 정치적ㆍ인적 기반에 대한 부여 왕권의 통제력이 고구려의 그것보다 미약했음을 의미한다.
3세기 무렵 고구려의 관명에는 대부분 ‘加’호가 탈락되어 있음이 확인되는데, 이는 관등 수여와 함께 ‘加’의 상징적 지위가 박탈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반면, 부여는 3세기까지도 여전히 官制 내에 馬加ㆍ牛加ㆍ猪加ㆍ狗加 등 ‘加’를 칭하는 관명이 다수 포진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이들을 중심으로 중앙권력이 형성되어 있었다. 이것은 3세기 당시에도 부여 사회 내에 諸加 세력이 보유하였던 자치적 지역 기반이 여전히 강고히 유지되고 있었음을 말해준다. 그리고 부여ㆍ고구려 관제 상에 나타나는 이러한 차이는 이후 양국에서 나타나는 중앙의 집권력 혹은 지방에 대한 지배 방식의 차이와도 연결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