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소의 뿔에 얽힌 엉뚱하고 재미있는 이야기
작성자관리자
작성일2021-06-22 16:1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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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소의 뿔에 얽힌 엉뚱하고 재미있는 이야기
동국대학교 사학과 김승현
2016 리우데자네이루 올림픽 여자 양궁 단체 결승전, 미국 NBC 방송 해설위원은 “농구에서 미국 드림팀의 위상을 양궁에서는 한국팀이 가지고 있습니다.”라고 언급했습니다. 이후 멋지게 여자 단체 양궁 올림픽 8연패에 성공한 우리나라 대표팀! 주몽, 이성계와 같이 건국 시조 2명이 활쏘기의 달인이었고, 국가적 차원에서 백성들에게 꾸준히 활쏘기를 장려했던 만큼, 과거부터 지금까지 활쏘기는 우리 민족의 특기였는데요? 오늘 이 자리를 빌려서 조선의 활, 각궁과 관련된 이야기를 풀어보려고 합니다.
[사진 1] 조선의 활, 각궁
각궁은 한자로 <角弓> 이라고 적습니다. 즉 뿔로 만든 활이라는 뜻인데요, 왼쪽에 있는 사진은 활의 탄력을 유지하기 위해서 시위를 풀어놓은 모습이고, 오른쪽에 있는 사진은 시위를 걸어둔 모습입니다. 세계의 다양한 활들이 존재하지만 우리나라의 활은 동물성, 식물성 재료를 복합적으로 섞어서 만들고 재료간의 밀고 당기는 힘으로 인해 탄력이 증가하고, 쏘는 사람의 기력에 따라 힘 조절이 가능한 살아있는 활(弓)이라고 불립니다.
재료로는 앞에서 언급한 뿔과 더불어 대나무, 뽕나무, 참나무, 소의 힘줄, 민어부레, 소가죽, 화피(자작나무껍질) 등을 사용합니다. 조선은 조총과 같은 화약무기가 원활하게 보급되기 전까지 각궁을 주요 무기로 사용했습니다. 당연히 수많은 양의 뿔이 필요했는데요? 문제는 각궁에서 최고로 치는 것은 물소 뿔로 만든 수우각궁(흑각궁)입니다. 하지만 큰 문제점은 우리나라에서 물소가 자라지 않는다는 점이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조선이 물소의 뿔로 각궁을 제작하려면 100% 일본, 중국, 동남아 등등에서 물소의 뿔을 교역해오는 방법 밖에 없었는데 이는 각궁을 만들더라도 한정된 수량만 만들 수 있고 교역이 원활하지 않을 때는 각궁을 만들지도 못하는 문제점을 가져왔습니다.
이러한 답답한 상황은 『조선왕조실록』에서 다양하게 살펴볼 수 있습니다. 『세종실록 45권』, 『세종실록 68권』, 『문종실록 2권』 등에서 물소의 뿔을 구하기 위한 방안을 논의하는 것을 확인할 수 있으며, 『세종실록 68권』에 나와 있는 최윤덕이 병조에 내린 명령을 살펴보면
1. 평안도로 하여금 법을 어겨 몰수한 물품들을 가지고 요동(遼東)에 가서 물소뿔(水牛角)과 진사(眞絲)를 무역하여 각궁(角弓)을 만들게 할 것.
2. 조선시대 명나라에 바치는 물품을 관리하는 곳에서 관리한 옷감들을 가지고 요동에서 물소뿔과 진사(眞絲)를 바꾸어 병기를 만드는 곳으로 하여금 각궁(角弓)을 제조하게 할 것.
등등 각궁을 위한 노력을 꾸준히 했음이 드러납니다. 하지만 성종 11년 한명회가 “성화(成化) 13년 8월 26일에 사유를 갖추어 청원함에 따라 공경되게 성은(聖恩)을 입어 매년 한 차례씩 궁각(弓角) 50부(副)를 구매하도록 허락하시니, 신은 감격함을 이길 수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50부를 가지고는 각궁을 제작하는데 넉넉하지 못하여 신은 매우 민망스럽습니다.” 라고 말한 것으로 보아 약 40년 전이었던 세종, 문종의 시기에 했던 교역으로는 물소의 뿔을 충당하는 것은 매우 어려웠던 것으로 확인됩니다.
이러한 현실을 벗어나기 위해 노력했던 왕은 바로 세조입니다. 세조는 두 가지 방법을 활용해서 이를 타파하고자 하였는데.. 첫 번째 방법은 물소 뿔이 아닌 다른 재료를 활용해서 각궁을 만드는 것입니다. 세조는 조선 안에서 가장 긴 뿔을 가지고 있는 황해도의 황소들을 잡아서 각궁을 만들었는데 이를 향각궁(鄕角弓)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물소의 뿔을 사용했을 때는 뿔을 2개만 사용해도 괜찮았지만, 황소의 뿔은 그보다는 짧아서 3개나 사용해야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위력도 흑각궁에 비해 떨어지고 농사에 중요한 소를 잡아야 하는 문제점이 있어서 세조는 다른 방법을 찾았습니다. 바로 사슴의 뿔을 활용하는 것인데요, 이를 우리는 녹각궁(鹿角弓)이라고 부릅니다. 하지만 사슴의 뿔이 너무 짧고, 약재로서 녹용의 가치도 무시할 수 없었기에 금방 포기하게 됩니다. 두 번째 방법은 물소를 직접 기르는 것입니다. 하지만 명나라는 세종 10년부터 이어진 조선의 연이은 요청을 거부하고 있었습니다. 이에 대한 대안으로 나온 것이 물소를 일본에 요청해서 받아오는 것입니다. 명나라와 다르게 일본은 조선의 제안을 긍정적으로 검토했고 결국 세조 7년(1461년) 일본에서 승려 능면을 보내 암, 수 물소 한 마리씩을 바쳤습니다. 이후 『세조실록』의 기록을 살펴보면 추운겨울을 따듯한 경상도에서 나게 하고 봄에 창경궁으로 보냈다는 기록이 남아있습니다. 이때부터 이어진 물소 사육은 성종10년(1479)의 기록에 의하면 당시 가축사육담당을 하던 사복시(司僕寺)에는 물소 70여 마리가 있었다고 기록도 되어 있습니다. 또한 이후에 성종19년(1488)에는 심회·윤필상·홍응 등에게 물소 암수 각각 1두씩을 내려 주며 잘 기르라고 당부하였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조선에서도 물소를 사육하면서 물소 뿔의 보급이 원활하게 되나 싶었지만 명나라에 갔던 사절단이 물소 뿔을 몰래 사오다가 명나라에게 걸려서 조선의 사헌부에서 죄를 논의하는 것을 실록에서 확인할 수 있기에 이러한 노력이 있었음에도 이후에도 물소 뿔에 대한 공급이 수요를 따라가지 못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사실 조선은 명나라와 일본 뿐 만 아니라 류큐왕국에서도 물소의 뿔을 많이 구할 수 있었습니다. 류큐왕국? 굉장히 생소한 단어인데요? 혹시 오키나와라고 하면 이해가 빠를까요? 류큐왕국이 현재의 오키나와입니다. 임진왜란 이후에 일본에게 점령당하고 메이지 유신 때 일본의 현으로 편입되었는데 임진왜란 전까지는 류큐왕국이라는 독립국가로 존재하고 있었습니다. 류큐왕국은 동중국해 남단에 위치해있는데요? 류큐왕국은 명나라와 조선에 조공을 바치기도 하고 간간히 표류해온 어민들을 돌려보내는 등 동아시아 세계에서 비중 있는 조연의 역할을 맡고 있었습니다. 류큐왕국은 아시아 북단과 남단의 한가운데에 있는 지리적 이점 덕분에 아시아 지역의 주요 무역 중심지로 발전하였습니다. 이를 알아볼 수 있는 유물 중에서 류쿠왕국의 수도였던 슈리성에서 출토된 종에 적힌 명문(銘文)이 있습니다. 바로 異産至寶, 充滿十方刹입니다. 해석하면 (우리왕국은) 선박을 통해 만국의 가교가 되고, 이국의 산물과 보배가 온 나라에 가득하다. 정도의 뜻이 되겠네요! 아무튼 이렇게 활발하게 교역을 하던 류큐왕국에서는 따뜻한 기후 덕분에 물소를 직접 재배했는데요? 여기서 생산된 물소 뿔은 조선과 명나라가 갈망하던 교역 품목 중 하나였다고 합니다.
이렇게 여러 왕들의 노력 그리고 조선과 주변국들의 교역으로 인해 물소 뿔은 예전에 비해 구하기 쉬워졌습니다. 조선에서 생산되는 각궁의 수 역시 증가하고 있었고요. 하지만, 1592년 일본의 전국시대를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에 의해 발생한 임진왜란은 조선의 무역 관계에 매우 큰 변화를 주었습니다. 전쟁을 경험하며 숙련도가 높아야 위력을 발휘하며 사용 조건이 까다로운 활의 단점과 초보자도 쉽게 사용할 수 있고 강력한 조총의 차이를 확연히 느끼게 된 조선은 전쟁 이후 조총병과 화약 무기를 양성하는 데 힘을 썼고 이는 자연스럽게 각궁에 대한 무관심으로 이어졌습니다. 숙종 조에 영의정을 지낸 허적의 말을 잠깐 참고해볼게요!
"군대 무기에서 조총(鳥銃)보다 더 좋은 것은 없다. 어린아이도 항우(項羽)를 대적할 수 있게 하는 것으로 참으로 천하에 편리한 무기다."
허적의 말에서도 드러났듯이 조선에서 조총은 굉장히 높은 평가를 받았고, 이는 정조 때 보병의 80% 이상이 모두 조총으로 무장하게 되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각궁은 기병과 의례용으로 사용되는 경우가 많았고 갑오개혁(1894년)에 이르러 군대의 제식 무기로서도 사용되지 않게 됩니다. 그렇다면 조선의 군대 정책과 맞물려 조선에서 물소의 뿔 역시 인기가 많이 떨어졌을까요? 그것은 아닙니다, 물소 뿔은 양반 관료의 신분을 상징하는 혁대의 재료로 쓰였기 때문에 임진왜란 이후에도 많은 인기를 끌었다고 전해집니다. 하지만 예전처럼 국가적 차원에서 물소 뿔을 구하고자 하는 노력은 찾아볼 수 없었고 조선 후기로 갈수록 조달에 차질이 생겨서 순조 32년(1832)부터는 일본에서 수입해오던 물소 뿔을 동으로 대신 수입하기로 했다고 하는 기록을 실록이 전하는 것을 마지막으로 물소 뿔과 관련된 이야기를 실록에서는 더 이상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우리 민족의 자부심이었던 활, 여러분은 활에 이렇게 다양한 이야기가 숨어있는지 아셨나요?
단순하게 무기로만 생각했던 활에 이렇게 다양한 이야기가 숨어있었습니다. 우리가 단순히 풍속화로만 알고 있던 ‘김홍도의 활쏘기’, 이제 거기에 그려진 활이 조금 다르게 보이지 않을까요? 저는 이번 칼럼을 준비하며 박물관을 돌아보던 중 수원화성에서 활쏘기 체험을 우연히 할 수 있었는데 같이 간 친구들에게 활과 관련되어 우리의 선조가 어떠한 노력을 했고, 활에 어떤 이야기가 숨어있는지 널리 알리고 왔답니다.
여러분, 우리가 알고 있는 다양한 물품들이 과거에 언제, 어디에서, 어떠한 가치를 지니고 색다른 이야기를 만들어냈는지 궁금해지지 않나요? 뒤에 있는 칼럼을 통해 더 알아보세요!